트윙클
트윙클 (Twinkle) · 1997 · Sem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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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 팩맨의 계보에 있습니다
1990년대 후반 국내에는 아케이드 기판을 직접 만들어 파는 회사가 여럿 있었습니다. 세미콤도 그중 하나였는데, 이 회사가 내놓은 게임들은 대체로 고전 명작의 구조를 가져와 자기식으로 살을 붙이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작품 역시 팩맨의 뼈대 위에 이런저런 장치를 얹어 만든 게임입니다. 국산 기판이 아직 오락실에 자리를 갖고 있던 시기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트윙클(Twinkle)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미로에서 점을 먹으며 적을 피하는 게임입니다. 동그란 모양의 주인공을 조종해 화면 안의 점을 다 먹으면 다음 판으로 넘어가고, 그 사이 미로를 돌아다니는 적에게 잡히면 안 됩니다. 규칙만 보면 익숙하지만, 실제로 잡아 보면 원조와 손맛이 꽤 다릅니다.
벽을 부수는 아이템이 흐름을 바꿉니다
이 게임의 핵심 차이는 아이템입니다. 팩맨에서 미로의 벽은 절대적인 경계였습니다. 벽을 따라 도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고, 그래서 추격전이 성립했습니다. 그런데 이 게임에는 벽을 부수는 폭탄이 있습니다. 벽이 사라지면 미로의 구조 자체가 달라지고, 쫓기던 상황에서 새 길을 뚫어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여기에 숨은 것을 보이게 해 주는 선글라스, 벽과 적을 함께 날려 버리는 레이저 계열 아이템 등이 더해집니다. 미로 곳곳에 숨겨진 과일 같은 보너스도 있어서, 점만 먹고 판을 넘길지 아니면 위험을 감수하고 점수를 더 챙길지 고르는 재미가 생깁니다. 특수한 구슬을 먹으면 잠깐 적을 거꾸로 잡아먹을 수 있다는 규칙은 원조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이 게임에서 능숙해진다는 것은 아이템을 언제 쓸지 결정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벽을 뚫는 폭탄을 초반에 아무 데나 쓰면 정작 몰렸을 때 쓸 것이 없고, 반대로 끝까지 아끼다가 그냥 잡히기도 합니다. 적이 두 방향에서 접근하는 것이 보이는 순간이 쓰기에 가장 좋은 자리입니다.
판이 많고 뒤로 갈수록 조여 옵니다
스테이지 수가 마흔 개에 이릅니다. 초반 몇 판은 미로가 넓고 적이 느려서 여유롭지만, 진행할수록 적의 수가 늘고 이동 속도가 빨라집니다. 미로 구조도 좁아져서 도망칠 길이 줄어듭니다. 초반의 감각으로 뒤 판에 들어가면 갑자기 막히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이때부터는 점을 남긴 순서까지 신경 써야 합니다.
이런 유형의 게임에서 가장 흔한 실수는 남은 점을 아무 데나 두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남은 몇 개의 점이 미로 반대편 구석에 흩어져 있으면, 그것을 먹으러 가는 동안 적에게 둘러싸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한쪽 구역을 완전히 정리하고 다음 구역으로 넘어가는 순서로 도는 것이 안전합니다.
도망칠 때는 막다른 길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기본입니다. 미로를 돌 때 한 바퀴로 이어지는 경로를 머릿속에 잡아 두고, 그 경로 위에서 움직이면 적이 붙어도 계속 돌면서 버틸 수 있습니다. 급하게 방향을 꺾어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는 순간이 대부분의 사망 지점입니다.
국산 기판이 오락실에 있던 시절
1990년대 중후반 국내에는 자체 기판을 만들던 회사가 여럿 있었고, 세미콤은 그중 꾸준히 물량을 내던 축이었습니다. 이 회사의 게임들은 대체로 잘 알려진 게임의 구조를 빌려 오되 캐릭터와 아이템을 새로 얹는 방식이었는데, 대작과 정면으로 경쟁하기 어려운 규모에서 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이 게임도 같은 개발진이 앞서 만든 팩맨 계열 작품의 흐름을 이어받은 형태입니다.
이런 게임들이 놓이던 자리도 정해져 있었습니다. 대형 오락실의 중앙보다는 동네 오락실 구석이나 문방구 앞, 상가 입구의 작은 기계였습니다. 격투 게임처럼 오래 앉아 있는 손님보다 지나가다 한두 판 하고 가는 손님을 노린 배치였고, 규칙이 단순한 미로 게임은 그런 자리에 잘 맞았습니다.
지금 다시 해 보면
국산 기판 게임 특유의 분위기가 있습니다. 색이 밝고 캐릭터가 동글동글하며, 배경음악이 귀에 붙습니다. 완성도가 아주 높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원조를 그대로 베끼지 않고 벽을 부순다는 발상을 넣은 것만으로도 나름의 자리를 갖습니다.
브라우저에서 바로 실행할 수 있으니, 그 시절 동네 오락실에서 봤던 것 같기도 한 게임의 정체를 확인해 보기에 좋습니다. 한 판이 짧고 규칙이 즉시 이해되기 때문에, 오래 붙잡을 게임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잠깐 손을 풀 게임을 찾는 상황에 잘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