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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 게임의 역사

동전 하나로 시작해 20년 동안 오락실을 채웠던 게임들

오락실 게임에는 처음부터 조건이 하나 붙어 있었습니다. 동전을 넣어야 시작된다는 것.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 조건이 게임의 생김새를 거의 다 결정했습니다. 한 판이 짧아야 하고, 짧은 판에서 강한 인상을 남겨야 하고, 죽고 나면 동전을 또 넣고 싶어야 했습니다. 레트로 게임 특유의 밀도와 악명 높은 난이도는 여기서 나왔습니다.

화면 하나가 전부였던 시절

1978년 스페이스 인베이더가 나오면서 오락실이라는 공간이 만들어졌습니다. 화면 하나에서 적을 다 없애면 다음 판이고 배경은 그대로였지만, 적이 줄어들수록 빨라지는 그 단순한 장치 하나로 사람들을 붙잡았습니다.

1980년 팩맨, 1981년 갤러그가 뒤를 이었습니다. 이 시기 게임에는 끝이 없었습니다. 클리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고 죽을 때까지 점수를 쌓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기계 옆에 붙어 있던 최고 점수 기록이 그래서 의미가 있었습니다.

1982년 제비우스가 나오면서 화면이 위로 흐르기 시작합니다. 정해진 코스를 따라가며 쏘는 종스크롤 슈팅이 여기서 자리를 잡았고, 1985년 1942 로 이어지며 파워업으로 기체를 강화하는 구조가 만들어졌습니다.

1980년대 — 장르가 갈라지다

1985년 마계촌은 지금도 회자되는 난이도로 유명했습니다. 갑옷이 벗겨지고 한 번 더 맞으면 죽는 구조라 동전이 순식간에 사라졌는데, 그런데도 계속 붙잡게 만드는 게임이었습니다.

1986년 보글보글은 다른 방향을 보여 줬습니다. 화면 하나에 두 명이 붙어 협력하는 구조였고, 한 대에 두 사람이 앉는 방식이 이때부터 일반화됩니다.

1987년 더블 드래곤이 나오면서 화면이 옆으로 흐르는 벨트스크롤 액션이 등장합니다. 1989년 파이널 파이트, 1991년 캡틴 코만도로 이어지며 오락실의 주력 장르가 됐고, 여럿이 동시에 붙어 진행하는 구조가 이 시기 오락실의 기본 풍경이 됩니다.

1990년대 초 — 대전격투의 시대

1991년 스트리트 파이터 2 가 나오면서 오락실의 성격이 완전히 바뀝니다. 그전까지 상대는 컴퓨터였는데 이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됐습니다. 이기면 계속하고 지면 물러나는 구조라 실력 차이가 그대로 드러났고, 모르는 사람이 옆에 앉아 동전을 올려놓으면 그게 곧 도전이었습니다.

이후 몇 년간 대전격투가 오락실을 뒤덮습니다. 1992년 아랑전설 2, 1997년 킹오파 97 로 이어지며 캐릭터와 커맨드를 외우는 문화가 만들어졌습니다. 커맨드 표를 손으로 적어 다니거나 잡지에서 오려 모으던 시절이었습니다.

1993년 버추어 파이터는 이 판을 다시 흔들었습니다. 도트가 아니라 폴리곤으로 만든 캐릭터가 처음 등장했고, 각지고 투박했지만 사람들이 몰려들어 구경했습니다. 여기서 시작된 3D 격투가 나중에 철권으로 이어집니다.

기판 이야기도 빼놓기 어렵습니다. 가정용 게임기는 본체 하나에 게임을 갈아 끼우는 구조지만, 오락실은 게임마다 전용 기판이 따로 있었습니다. 성능에 맞춰 게임을 만든 게 아니라 게임에 맞춰 회로를 짰기 때문에 같은 시기 가정용보다 늘 몇 수 위였습니다. 캡콤의 CPS, SNK 의 네오지오, 세가의 시스템 시리즈가 이 시기를 대표했습니다.

1990년대 후반 — 정점과 쇠퇴

1993년 던전 앤 드래곤은 벨트스크롤에 성장 요소를 얹었습니다. 때려눕히기만 하던 장르에 장비와 마법이 들어오면서 한 판이 훨씬 길어졌습니다.

메탈슬러그는 도트 그래픽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 준 쪽이었습니다. 기판 성능이 한계에 가까워지면서 오히려 완성도가 가장 높았던 시기입니다.

1997년 철권 3 은 3D 격투가 완성된 모습을 보여 줬습니다. 버추어 파이터가 던진 화두를 4년 만에 정리한 셈인데, 공교롭게도 오락실이 기울기 시작한 시점과 겹칩니다.

가정용 게임기가 3D 로 넘어가면서 판이 바뀌었습니다. 플레이스테이션이 나오자 집에서 할 수 있는 게임의 수준이 급격히 올라갔고, 오락실에 가야만 할 수 있는 게임이라는 명분이 약해졌습니다. 한국에서는 여기에 PC방까지 겹치면서 오락실이 빠르게 줄었습니다.

한국 오락실의 사정

국내에 들어온 게임 상당수는 정식 수입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름부터 제각각이었습니다. 정식 명칭이 ‘버블 보블’인 게임은 「보글보글」로 불렸고, ‘더 킹 오브 파이터즈’를 그 이름 그대로 부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예 엉뚱한 이름이 붙은 경우도 흔했습니다.

기판을 복제한 것, 캐릭터나 대사를 손본 것, 난이도만 바꾼 것까지 같은 게임의 변종이 여럿 돌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 하던 게임을 지금 찾아보면 기억과 미묘하게 다른 경우가 생깁니다. 기억이 틀린 게 아니라 정말로 다른 판본이었을 가능성이 적지 않습니다.

인기 있던 게임은 패미컴이나 슈퍼패미컴으로도 옮겨졌는데, 성능 차이가 커서 그대로 옮기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캐릭터 수를 줄이거나 스테이지를 통째로 들어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같은 제목이라도 오락실판과 가정용판은 다른 게임에 가깝고, 반대로 가정용판에만 있는 모드가 추가된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은

기판은 소모품이라 시간이 지나면 고장 납니다. 오락실이 문을 닫으면서 폐기된 것도 많아 온전히 남은 실물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게임들을 아직 접할 수 있는 건 기판의 동작을 소프트웨어로 재현해 둔 덕분입니다.

이 사이트에는 그렇게 남은 게임 4,588 13개 장르와 15개 기종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