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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아리마

데몬즈 크레스트 (Demon S Crest Europe) · 1994 · Ca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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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몹이 주인공이 되었다

마계촌을 해 본 사람이라면 붉은 악마를 잊을 수 없습니다. 아서를 향해 날아와 성가시게 굴다가, 창을 던지면 슥 피하고 다시 붙는 그 녀석 말입니다. 수많은 플레이어의 잔기를 앗아 간 이 잡몹이 어느 날 자기 이름을 달고 주인공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것도 곁다리 외전이 아니라, 자기 세계관과 자기 이야기를 통째로 가진 정식 작품으로 말입니다.

더 놀라운 건 게임의 분위기입니다. 마계촌은 무섭긴 해도 어딘가 만화 같은 구석이 있었는데,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합니다. 폐허가 된 마계, 무너진 탑, 시체 위에 앉은 왕. 배경 음악도 무겁고 느립니다. 주인공이 악마이니 구원하러 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힘을 빼앗긴 자가 되찾으러 가는 이야기입니다.

레드 아리마 어드벤처 게임 화면 1 - 슈퍼 패미컴 (1994)

어떤 게임인가

레드 아리마(Demon's Crest)는 캡콤이 만든 횡스크롤 액션 어드벤처입니다. 플레이어는 악마 파이어브랜드를 조종해 여러 지역을 돌며 문장이라 불리는 힘의 조각을 모읍니다. 스테이지를 순서대로 하나씩 깨는 구조가 아니라, 하늘을 날아 지도 위 지역을 골라 들어가는 방식입니다.

기본 조작은 걷기, 점프, 그리고 날개로 잠시 떠 있기입니다. 여기에 입에서 불을 뿜는 사격이 있습니다. 벽에 매달릴 수도 있어서, 벽을 타고 올라가다가 날아서 건너편으로 넘어가는 식의 이동이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마계촌 계열답게 발판이 좁고 적이 얄궂게 배치되어 있지만, 날 수 있다는 점 덕분에 실수를 만회할 여지가 훨씬 큽니다.

레드 아리마 어드벤처 게임 화면 2 - 슈퍼 패미컴 (1994)

변신이 곧 열쇠다

이 게임의 핵심은 변신입니다. 문장을 얻을 때마다 파이어브랜드는 다른 형태로 바뀌고, 형태마다 할 수 있는 일이 다릅니다. 어떤 모습은 물속을 헤엄쳐 다닐 수 있고, 어떤 모습은 특정 벽을 부술 수 있으며, 어떤 모습은 오래 날 수 있습니다. 공격 방식과 이동 성능이 통째로 갈립니다.

그래서 진행이 탐색형이 됩니다. 지나가다 부술 수 없던 벽, 건널 수 없던 물, 닿을 수 없던 높이가 나중에 새 형태를 얻고 나면 열립니다. 앞서 지나쳤던 곳이 어디였는지 기억해 두었다가 다시 찾아가는 재미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갈 수 있는 데가 몇 군데 안 되지만, 후반에는 지도가 넓게 트입니다.

변신은 그때그때 자유롭게 바꿀 수 있으니 아끼지 말고 자주 전환해 보는 게 좋습니다. 같은 방이라도 어떤 형태로 들어가느냐에 따라 난이도가 크게 달라집니다.

보스와 숨은 것들

보스들은 하나같이 크고 흉합니다. 화면을 반이나 차지하는 덩치가 느릿하게 움직이며 몰아붙이는데, 무작정 쏘기만 해서는 답이 안 나옵니다. 공격이 통하는 부위와 통하지 않는 부위가 나뉘어 있고, 특정 변신 형태의 공격이 유독 잘 먹히는 상대도 있습니다. 한 번 죽더라도 어떤 형태로 다시 들어갈지 고르는 게 공략의 시작입니다.

또 이 게임은 숨긴 게 많습니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 방, 부술 수 있는 바닥, 상점에서 살 수 있는 능력 강화가 곳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냥 진행만 해도 끝은 볼 수 있지만, 그렇게 가면 진짜 결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문장을 다 모아야 열리는 마지막 이야기가 따로 있습니다.

처음 하는 사람에게

난이도는 마계촌 계열답게 만만치 않습니다. 다만 즉사 함정보다는 체력을 깎는 방식이라 마계촌만큼 잔인하지는 않습니다. 체력 최대치를 늘려 주는 아이템이 있으니 초반에 부지런히 찾아 두면 뒤가 훨씬 편해집니다.

막혔을 때는 대개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아직 안 얻은 변신이 필요한 곳에 왔거나, 지나쳤던 지역에 다시 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벽을 계속 두들기기보다는 지도로 나와 다른 지역을 먼저 도는 편이 빠릅니다.

비행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형태에 따라 떠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긴 낭떠러지를 건널 때는 중간 발판을 눈으로 확인하고 뛰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지금 봐도 남다른 작품

캡콤이 슈퍼패미컴 말기에 내놓은 작품답게 그림과 음악의 완성도가 높습니다. 색을 어둡게 눌러 놓고도 형체가 또렷하게 보이도록 그린 배경, 무겁게 깔리는 음악이 세계관과 딱 맞아떨어집니다.

악당을 주인공으로 세운 게임 자체가 드물던 시절에 나온 데다, 탐색형 액션이라는 구성까지 갖춰서 지금 처음 하는 사람에게도 낯설지 않습니다. 마계촌은 너무 어려워서 못 즐겼던 사람이라면 오히려 이쪽이 더 잘 맞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