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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어스

레드 어스 (Red Earth War Zard Euro 961121) · 1996 · Ca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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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오버 화면에 암호가 떴다

이 게임에서 처음으로 놀랐던 순간은 죽었을 때였습니다. 게임 오버 화면에 짧은 암호가 떠 있었고, 그걸 적어 두었다가 다음에 입력하면 그동안 올려 둔 레벨 그대로 이어서 할 수 있었습니다. 오락실 게임인데 캐릭터가 성장하고, 그 성장이 다음 날까지 남는다는 발상이 당시로서는 낯설었습니다.

그래서 이 게임을 하던 사람들은 주머니에 암호를 적은 쪽지를 넣고 다녔습니다. 레벨이 오르면 새 기술이 열리고 체력도 늘어나기 때문에, 어제까지 손도 못 대던 보스를 오늘 잡게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레드 어스 대전격투 게임 화면 1 - 오락실 (1996)

어떤 게임인가

레드 어스(Red Earth)는 네 명의 주인공 중 하나를 골라 거대한 몬스터들과 차례로 맞서는 대전 액션 게임입니다. 사람끼리 붙는 대전 모드도 있지만, 이 게임의 중심은 컴퓨터가 조종하는 거대 보스와의 1대1 싸움입니다.

고를 수 있는 주인공은 짐승의 특징을 지닌 전사, 검을 쓰는 닌자, 기공을 다루는 소녀, 마법 지팡이를 든 여성 마법사입니다. 넷의 간격과 공격 방식이 뚜렷하게 달라서 누구를 고르느냐로 게임의 인상이 크게 바뀝니다.

레드 어스 대전격투 게임 화면 2 - 오락실 (1996)

상대가 사람이 아니다

이 게임의 보스들은 사람 형태가 아닙니다. 화면 절반을 차지하는 짐승이나 마물이 상대이고, 이들에게는 별도의 체력 게이지와 남은 시간이 붙습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쓰러뜨리지 못하면 그대로 지는 구조라, 방어만 하고 버티는 전략이 통하지 않습니다.

보스마다 공격 패턴이 명확하게 나뉘어 있어서, 몇 번 죽어 보면 어디서 들어가고 어디서 물러서야 하는지가 보입니다. 그 순간부터 이 게임은 반사신경 싸움이 아니라 패턴을 읽는 싸움이 됩니다.

새 기판의 첫 얼굴

이 게임은 캡콤이 새로 만든 기판에서 돌아간 첫 작품입니다. 그래서 캐릭터 도트의 크기와 색 수, 애니메이션 프레임이 그때까지의 캡콤 게임과 확연히 달랐습니다. 큰 캐릭터가 부드럽게 움직이는 화면 자체가 하나의 볼거리였습니다.

같은 기판에서 이후에 스트리트 파이터 III 시리즈가 나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게임은 캡콤 2D 격투 그림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문턱에 서 있는 작품입니다.

국내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게임

새 기판을 쓴 탓에 도입 비용이 높았고, 국내 오락실에서는 이 게임을 들여놓은 곳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름은 들어 봤지만 실제로 해 본 적은 없다는 사람이 유독 많은 게임이기도 합니다.

지금 다시 해 보면, 사람과의 대전에 무게를 둔 다른 격투 게임들과는 목적이 다르다는 게 분명히 느껴집니다. 혼자서 조금씩 강해지며 앞으로 나아가는 재미에 초점을 맞춘, 액션 롤플레잉에 가까운 감각의 게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