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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로빈

레드 로빈 (Red Robin) · 1986 · Elettrono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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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서 건너온 낯선 화면

1980년대 오락실 기판은 사실상 일본과 미국의 것이었습니다. 남코, 코나미, 타이토, 세가, 아타리, 윌리엄스. 그 틈에서 이탈리아 회사가 만든 기판이 돌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은 지금 봐도 조금 신기합니다. 레드 로빈은 그 드문 예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탈리아 아케이드 업계는 그 시절 나름의 생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자체 개발보다는 일본 기판을 들여와 유통하거나, 인기 기판을 개조해 파는 쪽이 훨씬 컸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기 이름을 걸고 오리지널 기판을 내놓았다는 것 자체가 이 게임의 첫 번째 이야깃거리입니다.

기판을 뜯어보면 사정이 더 잘 보입니다. 이 게임은 당대 유행하던 고성능 보드가 아니라, 훨씬 앞 세대의 단순한 구성 위에서 돌아갑니다. 음원도 그 시절 소형 기판에서 흔히 쓰던 것으로, 화려한 소리보다는 짧고 반복되는 전자음에 가깝습니다. 큰 회사의 물량 공세와 맞붙기보다는, 있는 부품으로 만들 수 있는 게임을 만든 결과에 가깝습니다.

레드 로빈 플랫폼 게임 화면 1 - 오락실 (1986)

무엇을 하는 게임인가

레드 로빈(Red Robin)은 세로로 긴 화면을 쓰는 액션 플랫포머입니다. 조작은 레버와 버튼 몇 개로 끝납니다. 좌우로 움직이고, 뛰어오르고, 발판과 사다리를 타고 화면을 오르내리면서, 돌아다니는 적을 피하거나 처리하며 목표 지점까지 가는 것이 한 판의 기본 흐름입니다.

이 구조는 1980년대 초중반 오락실에서 대단히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동키콩이 만들어 놓은 문법 — 화면 전체를 한눈에 보여 주고, 발판을 오르는 것 자체를 게임으로 만든 방식 — 이 몇 년 동안 수많은 게임의 뼈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레드 로빈도 그 계보 위에 서 있습니다.

세로 화면이라는 점은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가로로 긴 화면이라면 좌우 이동이 중심이 되지만, 세로 화면에서는 위아래로 쌓인 구조물이 화면을 가득 채웁니다. 자연스럽게 오르는 동작과 떨어지는 위험이 게임의 중심이 됩니다.

처음 하면 어디서 막히는가

이 시절 게임에서 목숨이 깎이는 가장 흔한 이유는 적이 세서가 아닙니다. 점프 거리를 잘못 재서 떨어지거나, 착지 지점에 적이 지나가는 것을 못 보고 뛰어드는 쪽이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처음 몇 판은 점프하면 몇 칸을 가는지, 뛰는 도중에 방향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는지를 몸으로 익히는 데 써야 합니다.

요령은 단순합니다. 급할수록 한 박자 쉬는 것입니다. 발판 앞에 서서 적이 지나가는 주기를 한 바퀴 지켜보고 나서 움직이면, 무작정 뛰어드는 것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습니다. 이 시절 적들은 대체로 정해진 경로를 정해진 속도로 반복하기 때문에, 몇 초만 관찰해도 다음 위치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난이도가 튀는 지점도 예상 가능합니다. 판이 넘어갈수록 적의 수가 늘고 이동 속도가 빨라지면서, 앞판에서 통하던 여유가 사라집니다. 관찰할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 실질적인 난이도 상승입니다. 이때부터는 매번 확인하는 대신, 안전한 경로 하나를 정해 놓고 그 길만 반복하는 쪽이 유리합니다.

잔기와 점수, 그 시절의 설계

오늘날의 게임은 대체로 끝을 보여 주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 시절 오락실 게임은 달랐습니다. 끝이 없거나, 있어도 사람이 도달하기 어려운 곳에 있었고, 대신 점수가 실질적인 목표였습니다. 기계 위에 남는 최고 점수 기록이 그날 오락실의 순위표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게임들은 잔기를 아끼는 것이 곧 실력이었습니다. 동전 하나로 얼마나 오래 버티느냐가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을 갈랐습니다. 위험을 감수하고 점수를 더 먹을지, 안전하게 판을 넘길지를 매 순간 저울질하는 것이 이 장르의 재미였습니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시작하자마자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는 균형이 잘못 잡혀서라기보다, 동전을 계속 넣게 만드는 것이 설계 목표였기 때문입니다. 그 사정을 알고 시작하면 초반의 벽이 덜 당황스럽습니다.

지금 다시 해 볼 만한 이유

한국 오락실에서 이 게임을 봤다는 기억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국내에 들어온 기판은 일본 유통망을 탄 것이 대부분이었고, 유럽 소규모 제작사의 물건이 바다를 두 번 건너오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이런 게임은 대체로 나중에 보존된 기록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런 이유로 이 게임의 가치는 완성도보다 다른 데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오락실의 역사가 실제로는 훨씬 넓었고, 이름이 남지 않은 회사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게임을 만들고 있었다는 증거라는 점입니다.

조작이 단순하니 설명서 없이도 몇 분이면 파악됩니다. 한 판이 짧고, 실수하면 바로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 부담도 없습니다. 40년 전 이탈리아의 작은 개발실이 어떤 게임을 만들었는지 궁금하다면, 그 답을 확인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