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디시
브랜디시 (Brandish USA) · 1995 · Ko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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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을 틀면 화면이 돈다
이 게임을 처음 켠 사람은 십중팔구 방향 감각을 잃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인데, 주인공이 왼쪽이나 오른쪽을 향하면 캐릭터가 도는 게 아니라 던전 전체가 통째로 회전합니다. 주인공은 언제나 화면 위쪽을 바라보고 있고, 세상이 그에 맞춰 돌아가는 셈입니다.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어지럽고 답답합니다. 그런데 몇 층을 내려가다 보면 이상하게 몸에 붙습니다. 내가 보는 방향이 곧 화면의 위쪽이니, 지도를 머릿속에서 회전시킬 필요 없이 눈앞의 그림만 따라가면 됩니다. 좁은 통로와 갈림길로 가득한 던전에서는 오히려 이 방식이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옵니다.
어떤 게임인가
브랜디시(Brandish)는 지하 깊은 곳에 파묻힌 도시를 층층이 내려가며 탈출구를 찾는 액션 RPG입니다. 주인공은 현상금 사냥꾼 아레스이고, 그를 쫓던 여마법사 도라와 함께 무너진 땅속에 갇힌 상태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목표는 단순합니다. 위로 올라가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전투는 실시간입니다. 칼을 휘두르는 버튼과 방어, 마법이 있고, 적과의 거리와 방향을 맞춰 가며 싸웁니다. 여기에 상자를 열고 함정을 피하고 스위치를 눌러 길을 여는 탐색 요소가 겹칩니다. 층마다 지도가 있고, 어디를 갔고 어디가 막혔는지 확인해 가며 나아가는 구조입니다.
던전이 곧 이 게임의 전부
브랜디시에는 넓은 세계 지도도, 마을을 돌며 사람을 만나는 과정도 거의 없습니다. 있는 것은 층층이 쌓인 던전뿐입니다. 그래서 이 게임의 재미는 전투의 화려함보다 길을 푸는 과정에 있습니다. 잠긴 문 앞에서 열쇠를 찾아 헤매고, 벽처럼 보이던 곳이 사실 통로였음을 알아차리고, 함정 방을 어떻게 통과할지 궁리하는 시간이 대부분입니다.
무기와 방어구에는 내구도가 있어 쓰다 보면 망가집니다. 좋은 무기를 아껴 두었다가 정작 필요할 때 못 쓰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잡몹은 값싼 무기로 상대하고 강한 적에게 좋은 장비를 쓰는 관리가 필요합니다. 이 요소 때문에 상점과 회복 지점의 위치를 기억해 두는 것이 중요해집니다.
막히는 지점과 요령
처음 하는 사람이 가장 자주 겪는 문제는 길을 잃는 것입니다. 회전 시점 때문에 방금 지나온 방향을 헷갈리기 쉬우니, 조금 답답하더라도 지도를 자주 열어 보는 습관을 들이는 편이 낫습니다. 갈림길에서는 한쪽을 끝까지 밀어 본 뒤 돌아오는 방식이 시간을 아낍니다.
두 번째는 무리한 전진입니다. 이 게임은 체력이 줄어드는 속도에 비해 회복 수단이 넉넉하지 않아서, 다음 층으로 내려가고 싶은 마음에 체력을 낮게 유지한 채 진행하면 예상치 못한 함정 한 번에 그대로 끝납니다. 층을 넘기기 전에 회복하고 저장해 두는 것이 기본입니다.
함정도 조심해야 합니다. 바닥이 꺼지거나 화살이 날아오는 방이 곳곳에 있고, 어떤 곳은 아예 아래층으로 떨어뜨려 왔던 길을 되돌아가게 만듭니다. 낯선 방에 들어가면 무작정 가로지르지 말고 벽을 따라 도는 편이 안전합니다.
팔콤과 코에이
원작은 니혼 팔콤이 PC용으로 만든 작품입니다. 이스와 드래곤 슬레이어로 알려진 그 회사인데, 브랜디시에서는 넓은 모험 대신 좁고 촘촘한 던전 탐색이라는 방향을 택했습니다. 이 슈퍼 패미컴판은 코에이가 콘솔로 옮긴 것으로, 시리즈 가운데 유일하게 해외에 영어판으로 나온 작품이기도 합니다.
콘솔로 옮기면서 조작 체계가 패드에 맞게 다듬어졌고, 그림과 음악도 손질되었습니다. PC판을 기억하는 사람 사이에서는 원작의 빡빡함이 조금 누그러졌다는 평이 있지만,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이쪽이 훨씬 들어가기 쉬운 관문입니다.
한국에서의 기억
국내에서 브랜디시는 널리 알려진 대작은 아니었지만, 슈퍼 패미컴 RPG를 파고들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름값이 있었습니다. 화면이 돌아간다는 특징 하나만으로도 잡지 기사에서 눈에 띄었고, 실제로 해 본 사람은 그 시점에 적응했는지 못 했는지로 감상이 크게 갈렸습니다.
지금 다시 해 보면, 요즘 게임에서는 보기 힘든 종류의 불친절함이 남아 있습니다. 대신 던전 하나를 온전히 자기 힘으로 풀어냈을 때의 성취감이 분명합니다. 지도를 켜 놓고 천천히 내려갈 준비가 된 사람이라면 충분히 붙잡고 놀 만한 게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