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즐러
거즐러 (Guzzler) · 1983 · Tehkan
게임 화면 하단에서 —키 변경 Controls Settings·저장·불러오기 Save State / Load State
이 게임의 주인공은 물을 머금은 파란 생물입니다. 물총처럼 물을 뿜어 불을 끄는데, 뿜을 때마다 몸속이 비어 갑니다. 몸이 비면 색이 빠져 윤곽선만 남은 모습이 되고, 대신 훨씬 빨라집니다. 즉 이 게임에서 무기를 쓰는 것은 곧 몸이 가벼워지는 일이고, 무장을 갖추는 것은 곧 느려지는 일입니다. 화력과 속도를 정면으로 맞바꾸게 만든 이 규칙이 거즐러의 전부라고 해도 좋습니다.
거즐러(Guzzler)는 미로 안을 돌아다니며 불길을 끄는 액션 게임입니다. 8방향 레버로 미로를 누비고, 버튼으로 물을 뿜습니다. 미로 안에는 모닥불이 네 군데 있고, 거기서 불길이 계속 흘러나와 플레이어를 쫓습니다. 불에 닿으면 죽으므로, 쫓아오는 불길을 물로 꺼 가며 버티는 것이 한 판의 흐름입니다.
세 발의 물과 웅덩이
물은 세 발까지만 담을 수 있습니다. 한 발 쏠 때마다 몸이 한 단계 비고 그만큼 빨라집니다. 세 발을 다 쏘면 완전히 비어 아주 빠르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이때는 불길을 피해 도망치는 것 말고 방법이 없습니다.
물을 다시 채우려면 미로 곳곳에 고여 있는 물웅덩이를 밟으면 됩니다. 그래서 이 게임의 동선은 항상 웅덩이를 염두에 두고 짜야 합니다. 불을 끄러 가는 길과 물을 채우러 가는 길이 엇갈리면 곤란해집니다. 웅덩이 위치를 먼저 파악하고, 그 근처에서 싸우는 것이 기본 전략입니다.
빈 몸이 빠르다는 점은 단점만은 아닙니다. 불길에 포위되어 도망쳐야 할 때는 오히려 물을 다 비워 버리는 편이 살아남을 확률이 높습니다. 일부러 세 발을 다 쏘고 빠져나간 다음, 안전한 곳에서 웅덩이를 찾아 다시 채우는 방식이 실전에서 자주 쓰입니다.
화면 가운데의 잔
가끔 미로 한가운데에 잔이 하나 나타납니다. 이것을 집으면 화면에 있는 적들이 잠시 움직이지 못합니다. 이 순간이 이 게임에서 가장 크게 벌 수 있는 기회입니다. 멈춘 사이에 위험한 구간의 불을 정리하거나, 물을 채우거나, 막다른 골목의 상황을 풀어 놓을 수 있습니다.
잔이 나타났을 때 무작정 달려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잔까지 가는 길이 불길로 막혀 있으면 오히려 그 길에서 죽습니다. 나타났다고 다 먹으려 하기보다, 지금 위치에서 안전하게 갈 수 있을 때만 가는 판단이 필요합니다.
미로에서 죽지 않는 법
이 장르의 기본은 막다른 길에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미로 안에는 반드시 한쪽이 막힌 통로가 있고, 거기서 불길과 마주치면 물이 없는 이상 방법이 없습니다. 통로에 들어서기 전에 뒤가 열려 있는지 확인하는 습관이 이 게임에서는 생존과 직결됩니다.
두 번째는 불길의 근원을 보는 것입니다. 불은 네 개의 모닥불에서 나옵니다. 눈앞의 불만 끄면 계속 새로 나옵니다. 근원 쪽을 어떻게 처리할지, 어느 방향에서 오는 불길을 먼저 막을지를 생각하며 움직여야 합니다.
세 번째는 교차로에서 한 박자 멈추는 것입니다. 미로에서 죽는 대부분의 경우는 모퉁이를 돌자마자 불길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입니다. 방향을 바꾸기 전에 그쪽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고 나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테칸이라는 이름
이 게임을 만든 테칸은 나중에 테크모로 이름을 바꾼 회사입니다. 즉 이 게임은 우리가 아는 테크모의 초기 시절 작품입니다. 이 회사가 훗날 오락실과 가정용 기기에서 여러 유명작을 남기게 되지만, 1983년의 이 시점에는 아직 한 화면짜리 미로 액션을 만들던 단계였습니다.
이 기판에는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같은 회사가 앞서 내놓은 다른 게임과 하드웨어를 공유해서, 그 기계를 이 게임으로 바꿔 다는 개조가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인기가 식은 기계를 새 게임으로 되살리는 것은 그 시절 오락실 운영의 일상이었습니다.
한국 오락실에서
한국에서 이 게임을 이름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1983년이면 국내 오락실에 팩맨 계열의 미로 게임이 이미 여럿 들어와 있었고, 그 사이에서 이 게임이 특별히 눈에 띄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몸이 비면서 빨라지는 규칙은 지금 봐도 신선합니다. 대부분의 게임이 강해지면 빨라지고 약해지면 느려지는데, 이 게임은 정반대로 걸어 두었습니다. 짧게 몇 판만 해 봐도 그 뒤집힌 감각이 손에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