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 굴리기
마블 매드니스 (Marble Madness SET 1) · 1984 · Atari Games
게임 화면 하단에서 —키 변경 Controls Settings·저장·불러오기 Save State / Load State
손바닥으로 구슬을 굴린다는 발상
오락실에 처음 들어가 이 기계를 봤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레버가 아니라 커다란 공입니다. 조종간 자리에 당구공만 한 트랙볼이 박혀 있고, 손바닥으로 그것을 굴리면 화면 속 구슬이 같은 방향으로 굴러갑니다. 버튼도 없습니다. 누를 것이 없으니 초보자는 잠깐 당황하지만, 손을 대는 순간 무엇을 하는 게임인지 몸이 먼저 알아차립니다. 굴리면 굴러가고, 세게 굴리면 빠르게 굴러가고, 내리막에서는 손을 떼도 계속 굴러갑니다.
조작이 이렇게 단순한데도 이 게임이 어려운 이유는 화면이 비스듬히 기울어진 입체 도면이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시점이라 화면의 위쪽이 실제로는 앞쪽 오르막이고, 오른쪽으로 미는 것이 화면상 대각선 이동이 됩니다. 머리로는 알아도 손이 헷갈립니다. 처음 몇 판은 구슬이 자꾸 낭떠러지 밖으로 굴러 떨어지는데, 그것이 이 게임의 첫 번째 관문입니다.
어떤 게임인가
구슬 굴리기(Marble Madness)는 트랙볼로 구슬 하나를 조종해, 제한 시간 안에 코스 맨 아래의 결승점까지 내려보내는 게임입니다. 스테이지는 공중에 떠 있는 파이프와 경사면과 계단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커다란 조형물이고, 구슬은 그 위를 굴러 내려갑니다. 적을 쓰러뜨리는 일도, 아이템을 모으는 일도 기본적으로는 없습니다. 목표는 오로지 떨어지지 않고, 시간 안에 도착하는 것입니다.
시간은 스테이지 시작 때 주어지고, 남은 시간은 다음 스테이지로 이월됩니다. 그래서 앞 코스를 여유 있게 끝내 시간을 아껴 두면 뒤쪽 어려운 코스에서 그 여유로 버틸 수 있습니다. 반대로 초반에 헤매면 뒤에서 시간이 모자라 손도 못 쓰고 끝납니다. 이 시간 저축 구조가 이 게임의 실력 차이를 만듭니다.
처음 하는 사람이 막히는 지점
가장 많이 죽는 이유는 적이 아니라 낙하입니다. 코스에는 난간이 거의 없어서, 속도가 붙은 상태로 커브를 만나면 그대로 바깥으로 튀어 나갑니다. 요령은 간단합니다. 내리막에서는 손을 떼는 게 아니라 반대 방향으로 살짝 굴려 브레이크를 걸어 주는 것입니다. 트랙볼을 굴리지 않으면 구슬은 관성으로 계속 가속하기 때문에, 감속도 손으로 해 줘야 합니다.
두 번째로 막히는 지점은 방향 감각입니다. 비스듬한 시점 때문에 '앞으로 가고 싶으면 위로'가 아니라 '앞으로 가고 싶으면 대각선 위로'가 됩니다. 익숙해지는 방법은 화면을 보지 말고 코스의 선을 따라 손을 움직여 보는 것입니다. 몇 판만 굴려 보면 손이 각도를 외웁니다.
코스 위에는 구슬을 밀어 떨어뜨리려 드는 방해물들이 나옵니다. 이것들은 대체로 정해진 자리에서 정해진 움직임을 반복하므로, 한 번 당해 본 자리는 다음번에 피할 수 있습니다. 이 게임을 잘하게 되는 과정은 반사신경을 기르는 것보다 코스를 외우는 쪽에 가깝습니다.
아타리가 만든 물건
만든 곳은 미국의 아타리 게임즈입니다. 같은 시기 일본 오락실 게임들이 캐릭터와 이야기를 앞세울 때, 아타리는 조작 장치 자체를 새로 만들어 붙이는 방식으로 승부를 걸곤 했습니다. 운전대, 요크, 그리고 이 트랙볼이 그렇습니다. 트랙볼은 아날로그 입력이라 레버로는 낼 수 없는 미세한 속도 조절이 가능했고, 이 게임은 그 특성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는 설계였습니다.
입체감을 내는 방식도 눈에 띕니다. 3D 폴리곤이 오락실에 오기 한참 전인 시절인데, 비스듬한 도법으로 그린 2D 그림에 물리 계산만 입체로 돌려서 진짜 경사면 위를 구르는 느낌을 만들어 냈습니다. 구슬이 경사를 타고 저절로 흘러내리는 그 감각은 지금 해 봐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오락실에서의 자리
국내 오락실에서는 캐비닛에 트랙볼이 달려 있어야 제대로 돌아가는 게임이라, 아무 데나 있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한 대라도 들어온 곳에서는 구경꾼이 붙는 기계였습니다. 손바닥으로 공을 문지르는 동작 자체가 눈에 띄었고,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동시에 굴리는 2인 대전도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코스를 둘이 함께 내려가며 누가 먼저 도착하는지 겨루는 방식이라, 서로 밀치고 방해하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의 어떤 게임과도 잘 묶이지 않는 물건이기도 합니다. 미로 게임이라기에는 길 찾기가 핵심이 아니고, 레이싱이라기에는 탈것이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지형과 관성을 상대하는 게임'이고, 이 계보는 이후 여러 구슬 굴리기 게임들이 이어받았습니다. 원조를 해 보고 싶다면 여전히 이 쪽이 가장 깔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