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헨 메이즈
메르헨 메이즈 (Marchen Maze Japan) · 1988 · Nam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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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임에서 적을 없애는 방법은 총도 검도 아닙니다. 비눗방울을 붑니다. 방울을 맞은 적은 죽지 않고 뒤로 밀려납니다. 계속 밀어붙여 발판 밖으로 떨어뜨려야 비로소 정리됩니다. 그래서 이 게임의 전투는 조준이라기보다 씨름에 가깝습니다. 상대를 어느 방향으로 밀어낼 것인지, 그 방향에 낭떠러지가 있는지를 계산하며 위치를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밀리는 것은 적만이 아닙니다. 잘못하면 자기가 먼저 떨어집니다.
메르헨 메이즈(Marchen Maze)는 남코가 1988년에 내놓은 쿼터뷰 액션 게임입니다. 화면을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주인공 소녀가 여러 스테이지를 지나며 적을 피하고 밀어내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바탕으로 삼은 작품이고, '메르헨'은 독일어로 동화라는 뜻입니다.
쿼터뷰라는 함정
이 게임의 진짜 난관은 적이 아니라 시점입니다. 화면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레버를 위로 밀면 화면상 위가 아니라 비스듬한 방향으로 갑니다. 머리로는 알아도 손이 따라가지 않아서, 처음에는 가려던 곳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다 발판에서 떨어지기 일쑤입니다.
깊이 감각도 문제가 됩니다. 비스듬히 보이는 화면에서는 발판의 가장자리가 정확히 어디인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아직 발판 위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넘어가 있는 경우가 자주 생깁니다. 그래서 이 게임에서는 가장자리 근처를 지날 때 한 칸 여유를 두고 도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이 어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은 결국 익숙해지는 것뿐입니다. 레버 방향과 화면상 이동 방향을 몸이 자동으로 변환하게 되면, 그때부터 이 게임은 전혀 다른 게임이 됩니다. 초반에 답답했던 만큼 감이 잡힌 뒤의 만족이 큰 종류의 게임입니다.
밀어내는 전투
비눗방울은 적을 즉시 없애지 못합니다. 여러 번 맞혀 계속 뒤로 밀어야 하고, 결국 발판 밖으로 떨어뜨려야 처리됩니다. 이 규칙 때문에 싸움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선 위치 선정이 전부가 됩니다. 적을 벽 쪽으로 밀면 아무리 맞혀도 처리되지 않고 시간만 흐릅니다. 반대로 낭떠러지를 등지게 만들어 놓고 밀면 몇 번 만에 정리됩니다. 그래서 적을 만나면 곧바로 쏘기보다, 먼저 자리를 잡아 밀어낼 방향을 만들고 나서 쏘는 편이 효율적입니다.
적이 여럿일 때는 더 까다롭습니다. 한쪽을 밀어내는 사이 다른 쪽이 다가오고, 밀어내려고 앞으로 나간 위치가 자신에게 위험한 자리가 되기도 합니다. 무리하게 다 처리하려 하기보다, 길을 막는 적만 정리하고 나머지는 지나쳐 가는 판단도 필요합니다.
밀어내는 방식이라 처리 속도가 느리다는 점도 부담입니다. 이 게임은 밀린 만큼 시간이 흐르고, 시간을 끌수록 상황이 나빠집니다. 언제 싸우고 언제 지나칠지를 정하는 것이 스테이지를 넘기는 핵심입니다.
동화를 무대로 삼은 화면
이 게임의 인상을 결정하는 것은 화면입니다. 남코의 이 시기 기판은 색을 풍부하게 쓸 수 있었고, 그 성능이 동화풍 배경에 그대로 쓰였습니다. 카드와 찻잔, 이상한 나라를 연상시키는 소품들이 쿼터뷰 발판 위에 배치되어, 여느 액션 게임과는 결이 다른 화면을 만듭니다.
캐릭터도 아기자기합니다. 주인공 소녀가 방울을 부는 동작, 적이 밀려나며 버둥거리는 모습 같은 것들이 부드럽게 그려져 있습니다. 무서운 분위기 없이 밝게 진행되기 때문에 어린 손님들이 부담 없이 잡을 수 있는 구성이었습니다.
이야기의 원작을 게임으로 옮긴 사례로서도 이른 편에 속합니다. 앨리스 이야기를 다룬 일본 게임 중 초기 작품으로 꼽히는데, 원작의 줄거리를 그대로 따라가기보다 분위기와 소재를 빌려 자기 게임을 만든 쪽에 가깝습니다.
국내에서의 자리와 이식판
이 게임은 일본 중심으로 나온 작품이라 국내 오락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판은 아니었습니다. 1988년 무렵 한국 오락실을 채운 것은 슈팅과 벨트스크롤 액션이었고, 이렇게 조작에 적응 시간이 필요한 게임은 동전 회전이 빠르지 않아 업주 입장에서 매력적이지 않았습니다.
이후 가정용으로 옮겨지기도 했습니다. 그 판에서는 쿼터뷰 대신 위에서 내려다보는 방식으로 바뀌었는데, 조작 적응 문제를 덜어내는 대신 원래 게임의 특징이었던 깊이감이 사라졌습니다. 무엇이 이 게임의 본질이었는지를 거꾸로 보여주는 변경입니다.
지금 다시 해 보면 이 게임은 남코가 화면과 발상 양쪽에서 이것저것 시도하던 시기의 산물로 읽힙니다. 밀어서 떨어뜨린다는 단순한 규칙 하나에 쿼터뷰라는 까다로운 시점을 얹어, 익히는 데 시간이 드는 대신 익히고 나면 다른 데서 얻기 어려운 감각을 주는 게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