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아폴리스
가이아폴리스 (Gaiapolis Ver Eaf) · 1993 · Kona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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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트스크롤 액션이 오락실을 뒤덮던 시기에, 코나미는 옆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판타지 액션을 만들었습니다. 캐릭터는 사방으로 걸어 다니고, 적을 베면 경험치가 쌓이고, 레벨이 오르면 실제로 세지는 구조입니다. 액션 게임에 롤플레잉의 성장 개념을 얹은 이 시도가 가이아폴리스를 같은 시기 다른 작품들과 확연히 구분되게 만듭니다.
가이아폴리스(Gaiapolis)는 코나미가 내놓은 내려다보는 시점의 판타지 액션 게임입니다. 세 명의 주인공 중 하나를 골라 스테이지를 진행하면서 몰려드는 적을 쓰러뜨리고, 마지막에 기다리는 보스를 잡아 다음 장으로 넘어갑니다. 제한 시간이 있어서 마냥 느긋하게 돌아다닐 수는 없습니다.
세 캐릭터, 세 가지 거리 감각
고를 수 있는 캐릭터는 검을 쓰는 왕자, 쌍무기를 휘두르는 요정, 그리고 용족의 검사입니다. 셋 다 근접 공격이 주력이지만 공격이 닿는 거리와 속도가 달라서 실제 플레이 감각은 꽤 다릅니다.
왕자는 검 계열답게 무난한 사거리와 위력을 갖고 있어 처음 잡기에 가장 편합니다. 요정은 몸집이 작고 빠르며 짧은 무기를 연달아 휘두르는 쪽이라, 적 사이를 파고들었다가 빠지는 움직임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맞습니다. 용족 검사는 묵직해서 한 대의 무게가 있는 대신 헛치면 그만큼 위험합니다.
처음 하는 사람이라면 사거리가 넉넉한 캐릭터를 고르는 편이 낫습니다. 이 게임은 적이 사방에서 붙는데, 사거리가 짧으면 적에게 닿기 위해 계속 몸을 들이밀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뒤나 옆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못 봅니다.
위에서 내려다본다는 것의 의미
옆에서 보는 벨트스크롤 액션은 위아래로만 줄을 맞추면 적과 같은 선에 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게임은 사방이 다 열려 있어서, 적이 등 뒤로 돌아 들어오는 상황이 수시로 생깁니다. 화면 어디를 봐야 하는지 감을 잡는 것이 첫 번째 과제입니다.
요령은 자기 캐릭터를 화면 한가운데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벽이나 지형을 등지고 서면 뒤에서 오는 공격이 원천적으로 사라져서, 신경 쓸 방향이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좁은 통로에서는 오히려 적이 한 줄로 들어오게 되어 처리하기 편해집니다.
또 하나는 몰려 있는 적 무리 한가운데로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사방 시점에서 포위당하면 빠져나갈 방향이 없어지고, 그 상태에서 체력이 순식간에 녹습니다. 무리의 가장자리를 물고 늘어져서 하나씩 떼어 내듯 처리하는 편이 훨씬 안전합니다.
성장이 붙어 있는 액션
적을 쓰러뜨리면 경험치가 쌓이고 레벨이 오릅니다. 오락실 게임에서 성장 요소는 조심스럽게 다뤄지는데, 자칫하면 앞에서 열심히 한 사람이 뒤 스테이지를 너무 쉽게 지나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게임은 제한 시간과 스테이지 난이도를 함께 올려서 균형을 잡습니다.
실용적인 요령은 초반 스테이지에서 시간을 다 쓰지 않는 선에서 적을 최대한 처리해 두는 것입니다. 나중에 어려워졌을 때 레벨 하나 차이가 크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욕심을 부리다 시간에 쫓기면 보스를 온전한 상태로 만나지 못합니다.
여러 명이 함께 붙어서 할 수 있는 구조라, 두 사람이 앞뒤로 서서 서로의 등을 봐 주는 식으로 하면 난이도가 눈에 띄게 내려갑니다. 혼자 할 때 가장 무서운 것이 등 뒤인데, 그 부담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코나미가 그 시절 하던 일
1990년대 초반의 코나미는 아케이드에서 대단히 넓은 영역을 건드리고 있었습니다. 슈팅, 스포츠, 벨트스크롤 액션, 퍼즐까지 동시에 만들어 냈고, 자체 기판을 계속 갱신하며 화면에 올릴 수 있는 스프라이트 수와 색을 늘려 갔습니다.
이 게임에도 그 기술적 여유가 드러납니다. 캐릭터가 많이 나와도 화면이 버겁게 느껴지지 않고, 보스급 적은 여러 조각을 조합해 크게 움직입니다. 판타지 세계관을 도트로 그려 내는 밀도 또한 이 시기 코나미의 수준을 보여 줍니다.
다만 이 작품은 코나미의 대표작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습니다. 같은 시기 회사 안에 훨씬 유명한 간판들이 있었고, 내려다보는 시점의 판타지 액션이라는 형태 자체가 오락실에서 크게 유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오락실에서의 위치와 지금
한국 오락실에서 이 게임을 또렷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같은 시기 격투 게임과 벨트스크롤 액션이 자리를 거의 다 차지하고 있었고, 판타지 소재의 액션은 상대적으로 밀렸습니다. 있는 곳에서는 있었지만 어느 오락실에 가도 반드시 있는 종류의 게임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다시 해 보면 오히려 그 낯섦이 장점으로 느껴집니다. 익숙한 벨트스크롤 문법을 기대하고 앉았다가 사방이 열린 시점에 당황하고, 뒤를 잡히지 않으려고 자세를 잡기 시작하면서 이 게임만의 리듬이 몸에 들어옵니다.
캐릭터를 바꿔 가며 다시 해 볼 값어치도 충분합니다. 같은 스테이지를 사거리가 짧은 캐릭터로 통과하는 것과 긴 캐릭터로 통과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고, 그 과정에서 이 게임이 왜 제한 시간을 걸어 두었는지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