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AKSILGAME

드래곤 워리어 4

드래곤 워리어 4 (Dragon Warrior Iv USA) · 1992 · Enix

방향버튼ASZX보조QERT동전Shift시작Enter

게임 화면 하단에서 —키 변경 Controls Settings·저장·불러오기 Save State / Load State

진짜 주인공은 다섯 번째 장에야 나옵니다

이 게임을 처음 켜면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이름을 짓고 모험을 시작한 그 사람이, 한참을 하다 보면 이야기에서 사라집니다. 그리고 전혀 다른 나라, 전혀 다른 인물의 이야기가 새로 시작됩니다. 애써 올린 레벨과 모아 둔 장비도 그대로 두고 떠나야 합니다. 처음 하는 사람은 여기서 당황합니다. 내가 뭔가 잘못한 건가 싶어집니다.

잘못된 게 아니라 설계입니다. 이 작품은 다섯 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고, 앞의 네 장은 각각 다른 인물이 주인공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장에 이르러서야 진짜 주인공이 등장하고, 앞 장에서 지나쳤던 사람들이 하나씩 합류합니다. 한 번 헤어졌던 인물이 뜻밖의 장소에서 다시 나타나 동료가 될 때의 감각은, 그 앞 네 장을 직접 겪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드래곤 워리어 4 RPG 게임 화면 1 - 패미컴 (1992)

어떤 게임인가

드래곤 퀘스트 4(Dragon Warrior IV)는 마을에서 정보를 얻고, 밖으로 나가 몬스터와 싸우며 레벨을 올리고, 새 지역을 열어 가는 정통 역할수행 게임입니다. 전투는 명령을 입력하면 순서대로 진행되는 방식이고, 주문과 도구를 어떻게 나눠 쓰느냐가 승부를 가릅니다. 목표는 세상을 위협하는 존재를 막는 것이지만, 그 결론에 이르는 길이 다섯 갈래로 나뉘어 있다는 점이 이 작품의 전부라고 해도 좋습니다.

각 장은 길이도 성격도 다릅니다. 어떤 장은 한 사람이 홀로 시작해 동료를 얻어 가고, 어떤 장은 처음부터 셋이 붙어 다닙니다. 장마다 쓸 수 있는 인물이 정해져 있어서, 매번 다른 편성으로 처음부터 다시 궁리해야 합니다. 같은 게임 안에서 짧은 게임을 다섯 번 하는 느낌에 가깝습니다.

드래곤 워리어 4 RPG 게임 화면 2 - 패미컴 (1992)

장마다 다른 사람, 다른 사정

첫 장의 주인공은 왕에게 명을 받은 병사입니다. 시작부터 힘으로 밀어붙일 수 있어서, 역할수행 게임을 처음 하는 사람에게 전투의 기본을 가르쳐 주는 구간입니다. 두 번째 장은 성 밖으로 몰래 빠져나온 공주와 그를 따라나선 두 신하의 이야기입니다. 공주는 무기를 들 수 없는 대신 맨손 공격력이 유별나게 높고, 신하 둘은 회복과 공격 주문을 나눠 맡습니다. 이 셋의 조합이 시리즈 전체에서도 손꼽히게 인기가 많습니다.

네 번째 장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는 자매의 이야기입니다. 한쪽은 회복과 방어를, 한쪽은 운에 크게 기대는 공격을 담당합니다. 성공하면 판을 뒤집고 실패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기술이 있어서, 도박 같은 전투가 됩니다.

물건을 팔아 돈을 버는 장

여러 장 가운데 가장 자주 이야기되는 것은 세 번째 장입니다. 여기서는 싸움꾼이 아니라 장사꾼이 주인공입니다. 처음에는 가게 점원으로 일하며 돈을 모으고, 나중에는 자기 가게를 차려 물건을 사고팝니다. 몬스터를 잡는 것보다 물건값을 잘 매기는 일이 더 중요해지는 구간이라, 갑자기 다른 장르의 게임을 하는 기분이 듭니다.

이 인물은 전투에서도 특이합니다. 싸움 도중에 마음대로 도망치기도 하고, 쓰러진 적이 흘린 물건을 챙겨 오기도 합니다. 통제가 안 되는 대신 뜻밖의 소득을 안겨 주는 캐릭터라, 후반에 합류시켜 두면 창고가 알아서 채워집니다. 이 장이 워낙 반응이 좋아서 나중에는 이 인물만 따로 주인공으로 세운 게임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마차와 자동 전투

마지막 장에는 마차가 등장합니다. 전투에 나서는 인원은 정해져 있지만, 나머지 동료를 마차에 태우고 다니다가 싸움 도중에 바꿔 넣을 수 있습니다. 앞에 선 동료가 쓰러져도 뒤에서 갈아 끼울 수 있으니 전멸 위험이 크게 줄어들고, 상대에 맞춰 편성을 바꾸는 재미도 생깁니다.

동시에 이 작품에는 유명한 골칫거리가 하나 있습니다. 동료들이 직접 조작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해 움직인다는 점입니다. 방침만 정해 주면 알아서 싸우는데, 그 판단이 늘 마음 같지는 않습니다.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 즉사 주문을 계속 던지거나, 아껴야 할 회복 주문을 엉뚱한 데 쓰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 답답함이 오히려 이 작품을 기억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어서, 지금까지도 농담거리로 오르내립니다.

요령은 방침을 상황에 맞춰 자주 바꿔 주는 것입니다. 보스전에서는 회복을 우선하도록 두고, 잡몹 구간에서는 주문을 아끼도록 두면 소모가 훨씬 줄어듭니다.

8비트 기계에서 이만큼

이 작품은 8비트 가정용 기계의 막바지에 나왔습니다. 하드웨어가 이미 한계에 다다른 시점에 다섯 장으로 나뉜 긴 이야기와 마차, 자동 전투까지 밀어 넣었으니 상당히 무리를 한 셈입니다. 그럼에도 진행이 크게 답답하지 않고, 음악은 지금 들어도 각 장의 분위기를 정확히 잡아 줍니다. 장이 바뀔 때마다 음악도 바뀌어서, 곡만 들어도 어느 장인지 떠오릅니다.

국내에서는 정식으로 발매되지 않았고, 언어의 벽 때문에 끝까지 본 사람보다 도중에 멈춘 사람이 훨씬 많았습니다. 그래도 이 시리즈의 이름값은 잡지와 공략집을 통해 충분히 알려져 있었고, 마을 사람 대사를 하나하나 사전 찾아 가며 읽었다는 이야기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지금 다시 잡아 보면 전투 화면은 소박한데 구성은 놀랄 만큼 야심 차다는 게 바로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