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내퍼
스내퍼 (Snapper Korea) · 1990 · Phil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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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실 기판 목록에서 제작사 칸에 한국 회사 이름이 적혀 있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뭅니다. 스내퍼는 그 드문 경우 중 하나입니다. 1990년 필코라는 국내 업체가 만든 아케이드 게임으로, 일본과 미국 게임 사이에서 국산 기판이 어떤 물건을 만들고 있었는지 보여 주는 기록 같은 작품입니다.
스내퍼(Snapper)는 미로를 돌아다니며 바닥에 깔린 것들을 모두 주워 먹으면 판이 넘어가는, 팩맨 계열의 미로 게임입니다. 화면 하나가 곧 한 판이고, 미로 안을 돌아다니는 적에게 닿으면 목숨이 하나 줄어듭니다. 레버 하나로 상하좌우를 정하는 것이 조작의 전부라, 규칙 설명이 필요 없는 종류의 게임입니다.
한 판의 흐름
미로 게임의 규칙은 단순합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점을 남김없이 먹으면 다음 판으로 넘어가고, 그동안 적들은 자기 나름의 규칙에 따라 통로를 돌아다닙니다. 목표는 명확하지만, 남은 점이 몇 개 안 남았을 때가 항상 가장 위험합니다. 넓게 흩어져 있던 점이 줄어들수록 이동 경로가 길어지고, 그 긴 이동 중에 적과 마주칠 확률이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게임을 잘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순서를 정해 놓고 먹습니다. 화면 한쪽 구석부터 차근차근 정리해 나가면 마지막에 남는 점들이 한곳에 모여 있게 되고, 위험한 장거리 이동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반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 아무 데나 먹으러 다니면, 후반에 화면 반대편까지 목숨 걸고 왕복하는 상황이 반복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교차로 관리입니다. 미로 게임에서 죽는 순간은 대부분 막다른 길이나, 갈림길에서 방향을 잘못 고른 직후입니다. 이동하는 동안에도 다음 갈림길에서 어느 쪽으로 빠질지 미리 정해 두면, 적이 다가와도 당황하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적을 읽는 요령
미로 게임의 적은 완전히 무작위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대개는 플레이어를 향해 다가오려는 성향과, 통로를 따라 도는 성향이 섞여 있습니다. 몇 판 해 보면 어떤 적이 집요하게 따라붙고 어떤 적이 제 갈 길을 가는지 감이 옵니다. 그 감이 생기면 적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을 유인해서 원하는 쪽으로 보내는 플레이가 가능해집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기술은 되돌아가기입니다. 통로에서 적과 정면으로 마주쳤을 때, 방향을 바꾸면 적도 방향을 바꾸는 데 한 박자가 필요합니다. 그 박자를 이용해 거리를 벌리고, 다음 갈림길에서 옆으로 빠지는 식으로 빠져나갑니다. 무작정 직진해서 부딪히는 것이 초보자가 가장 자주 하는 실수입니다.
여러 적에게 앞뒤로 끼이는 상황은 대체로 되돌릴 수 없으니, 애초에 그런 배치를 만들지 않는 것이 최선입니다. 통로를 따라 길게 이동하기 전에 반대편에 적이 있는지 한 번 훑어보는 습관만으로도 목숨이 훨씬 오래갑니다.
필코라는 이름
필코는 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에 걸쳐 아케이드 기판을 만들던 국내 업체입니다. 이 시기 한국의 게임 산업은 이제 막 걸음마를 떼던 단계였고, 오락실 기계는 일본에서 들어온 정식 기판과 카피 기판, 그리고 소수의 국산 제품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체 기판과 자체 게임을 만들어 낸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 국산 아케이드 게임은 대체로 검증된 장르를 택했습니다. 미로 게임, 슈팅, 퍼즐처럼 규칙이 널리 알려져 있어 손님이 설명 없이 바로 붙을 수 있는 형태입니다. 스내퍼가 팩맨 계열의 문법을 따르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발명하기보다, 잘 알려진 형식 위에서 자기 색을 조금씩 얹는 방식입니다.
이 무렵 국산 게임들은 대형 오락실보다 동네 문방구 앞이나 작은 가게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화려한 대작 옆이 아니라, 잔돈으로 짧게 즐기는 자리에 놓이던 물건들입니다.
이런 게임이 오래 살아남는 이유
미로 게임은 1980년 팩맨 이후 수없이 복제되고 변형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계속 만들어진 이유는 규칙이 완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먹는다, 쫓긴다, 판이 넘어간다. 이 셋만으로 게임이 성립하고, 난도는 적의 속도와 미로 구조만 손보면 얼마든지 조절됩니다. 만드는 쪽에게는 부담이 적고, 하는 쪽에게는 배울 것이 없다는 점에서 서로 이득인 형식입니다.
한 판이 짧다는 것도 오락실에서는 큰 장점이었습니다. 뒤에 사람이 줄을 서 있어도 부담 없이 한 판 하고 비켜 줄 수 있고, 잘하면 같은 백 원으로 오래 버틸 수 있습니다. 슈팅이나 액션처럼 진입 장벽이 있는 장르와 달리, 처음 잡은 사람도 첫 판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는 점이 컸습니다.
지금 해 본다면
지금 기준으로 보면 화면도 소박하고 연출도 없습니다. 하지만 미로 게임은 그래픽으로 하는 게임이 아니라 경로로 하는 게임이라, 세월이 지나도 재미의 핵심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몇 판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최적의 동선을 계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이 게임은 그 시절 한국에서 게임을 만들려 했던 사람들의 흔적입니다. 완성도를 따지기 전에, 국산 기판에 한국 회사 이름이 박혀 오락실에 놓였다는 사실 자체가 기록으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 눈으로 보면 단순한 미로 게임 한 판도 조금 다르게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