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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시티 2000

심시티 2000 (Simcity 2000) · 1996 · Max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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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도로를 그은 그 순간

이 게임을 켜면 아무것도 없는 초록색 땅이 먼저 나옵니다. 나무 몇 그루와 강줄기뿐인 그 화면 앞에서 사람들은 대개 한참을 머뭇거립니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알려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마우스를 끌어 도로 한 줄을 긋고, 그 옆에 주거 구역을 칠하고, 발전소를 하나 세웁니다. 몇 달이 지나면 그 빈 칸에 작은 집들이 저절로 돋아납니다. 내가 지은 게 아니라 사람들이 알아서 들어와 사는 그 장면이, 이 게임에 붙들리게 만드는 첫 번째 장면입니다.

전작이 평면 위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면 이 작품은 화면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습니다. 땅에 높낮이가 생기고, 언덕과 계곡이 도시 모양을 제약합니다. 강을 건너려면 다리를 놓아야 하고, 경사가 급한 곳에는 건물이 잘 들어서지 않습니다. 지형을 먼저 읽고 도시를 얹는 감각이 이때부터 생겼습니다.

심시티 2000 전략·시뮬레이션 게임 화면 1 - 플레이스테이션 (1996)

무엇을 하는 게임인가

심시티 2000(Simcity 2000)은 시장이 되어 도시를 설계하고 운영하는 게임입니다. 직접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땅의 용도를 정해 주는 것이 핵심입니다. 주거·상업·공업 세 가지 구역을 칠해 두면 그 자리에 시민들이 알아서 집과 가게와 공장을 세웁니다. 시장이 직접 짓는 것은 도로와 전선, 수도관, 그리고 경찰서·소방서·학교·병원 같은 공공시설입니다.

돈은 세금에서 나옵니다. 세율을 올리면 당장 수입은 늘지만 사람들이 떠나고, 낮추면 사람은 모이는데 곳간이 빕니다. 매년 예산 창을 열어 경찰과 소방, 교통, 교육, 보건에 얼마씩 배분할지 정해야 하는데, 어디를 깎아도 반드시 어딘가에서 문제가 터집니다. 이 줄타기가 한 판의 뼈대입니다.

승리 조건이 따로 없다는 점이 이 게임의 성격을 말해 줍니다. 끝이 없으니 목표는 스스로 세워야 합니다. 인구 십만을 넘겨 보겠다는 사람도 있고, 격자무늬 하나 없이 곡선으로만 도시를 만들어 보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기와 물, 그리고 교통

초보자가 가장 먼저 부딪히는 벽은 전기입니다. 구역을 칠했는데 건물이 안 들어서고 번개 표시만 깜빡인다면 발전소에서 전선이 닿지 않은 것입니다. 건물끼리 붙어 있으면 전기가 이어지지만 한 칸이라도 떨어지면 끊깁니다. 도시 외곽으로 뻗어 나갈 때는 전선을 같이 끌고 가야 합니다.

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이나 호수 옆에 취수장을 짓고 수도관을 땅 아래로 깔아야 합니다. 수도관은 지하 화면으로 전환해서 놓아야 하는데, 이 화면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한참 헤매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이 안 닿으면 인구가 어느 선에서 더는 늘지 않습니다.

교통은 도시가 커진 다음에 문제가 됩니다. 도로만으로 버티다 보면 출퇴근 시간에 길이 새빨개지고, 그러면 공장이 문을 닫고 사람들이 빠져나갑니다. 이때 지하철과 철도를 깔아야 합니다. 지하철역과 지하철 노선을 함께 놓아야 작동하는데, 역만 찍어 놓고 왜 안 되냐고 하는 실수가 흔합니다.

재해와 오래된 도시의 문제

이 게임에는 화재, 홍수, 토네이도, 지진, 비행기 추락, 심지어 괴수 습격까지 들어 있습니다. 재해를 꺼 놓고 조용히 도시만 키울 수도 있지만, 켜 두면 도시가 얼마나 취약했는지가 그때 드러납니다. 소방서 배치가 성겼던 구역은 불이 번지는 동안 손도 못 씁니다.

공해도 조용히 도시를 갉아먹습니다. 공업 구역을 주거 구역 바로 옆에 붙여 놓으면 땅값이 떨어지고 슬럼이 생깁니다. 바람 방향까지 고려해서 공장을 도시 가장자리로 몰아 두는 것이 정석입니다. 석탄 발전소를 오래 쓰다 보면 어느 시점에 수명이 다해 폭발하듯 멈추는데, 이걸 놓치면 도시 절반이 한꺼번에 정전됩니다.

시간을 견디는 게임

발매 이후 이 게임은 여러 기종으로 옮겨졌고, 플레이스테이션판은 패드로 커서를 움직이는 방식이라 마우스보다 손이 느립니다. 대신 소파에 앉아 몇 시간이고 도시를 굴리기에는 오히려 편합니다. 화면 아래 도구 모음에서 원하는 도구를 골라 찍는 조작에만 익숙해지면 금방 몰입합니다.

국내에서는 잡지 부록이나 PC방을 통해 이름이 먼저 알려진 쪽에 가깝습니다. 총을 쏘거나 때리는 게임이 아닌데도 밤을 새우게 만든다는 점에서, 게임이 꼭 대결일 필요는 없다는 걸 처음 알려 준 작품이기도 합니다. 지금 다시 켜도 화면 하나 가득 자란 도시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재미는 그대로입니다.

도시가 저절로 자라기 시작할 때

이 게임을 오래 붙들게 되는 순간은 따로 있습니다. 초반의 허덕임을 넘기고 나면 세금이 알아서 들어오고, 인구가 알아서 늘고, 빈 땅이 알아서 채워지는 구간이 옵니다. 그때부터는 손을 놓고 도시가 자라는 걸 지켜보게 됩니다. 그러다 한 구역의 땅값이 유난히 낮은 걸 발견하고 공원을 심어 보고, 시청을 옮겨 보고, 다시 지켜봅니다.

인구가 일정 선을 넘으면 시장 관저와 시청 같은 건물이 열리고, 더 커지면 공항과 항만처럼 큰 시설을 지을 수 있습니다. 이 해금 조건들이 다음 목표가 되어 주기 때문에, 승리 조건이 없는데도 계속할 이유가 생깁니다. 도시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고 싶어지는 것도 이 무렵입니다. 한 번 굴려 보고 나면 무엇을 어디에 놓아야 하는지 알게 되니까, 더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