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전트 슈퍼 본드
에이전트 슈퍼 본드 (Agent Super Bond Scobra Hardware Bad Colours) · 1985 · Signatron
게임 화면 하단에서 —키 변경 Controls Settings·저장·불러오기 Save State / Load State
1980년대 중반 미국 오락실 업계에는 컨버전 키트라는 물건이 돌아다녔습니다. 새 기계를 통째로 사는 대신, 이미 갖고 있는 기계의 롬 칩만 바꿔 끼워 다른 게임으로 만드는 상품입니다. 이 게임도 그런 키트였습니다. 슈퍼 코브라나 스크램블이 돌아가던 캐비닛의 칩 몇 개를 갈아 끼우면, 어제까지 비행기를 몰던 기계가 오늘은 첩보원을 조종하는 기계가 되었습니다.
에이전트 슈퍼 본드(Agent Super Bond)는 미로 같은 통로를 돌아다니며 달려드는 적을 쏘고, 목표한 물건을 찾아 판을 넘기는 액션 슈팅 게임입니다. 유명한 첩보 영화를 노골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제목과 분위기를 내세웠지만, 실제 조작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화면에서 사방으로 총을 쏘며 길을 뚫는 방식입니다.
한 판이 흘러가는 방식
시작하면 통로와 방으로 이루어진 구역에 놓입니다. 여기저기서 적이 나타나 다가오고, 곳곳에 획득해야 할 물건이 놓여 있습니다. 필요한 것을 모두 챙기고 출구로 빠져나가면 다음 구역으로 넘어갑니다.
핵심은 사격과 이동을 동시에 관리하는 것입니다. 좁은 통로에서 정면으로 마주친 적은 쏘면 되지만, 뒤에서 따라붙는 적까지 신경 쓰면서 물건을 주우려면 동선이 꼬입니다. 막다른 길로 들어갔다가 앞뒤로 막히는 것이 이 게임에서 가장 흔한 죽음입니다.
그래서 요령은 단순합니다. 들어가기 전에 빠져나올 길을 정해 두는 것입니다. 통로 하나를 밀고 들어가되 뒤가 열려 있는지 계속 확인하고, 물건 하나를 챙기면 곧바로 넓은 곳으로 물러나 정리하는 식으로 끊어 가면 훨씬 오래 버팁니다.
어디서 난이도가 튀는가
초반 구역은 적이 적고 통로가 넓어 여유가 있습니다. 문제는 진행할수록 적이 나타나는 간격이 짧아진다는 점입니다. 하나를 처리하는 동안 둘이 더 나타나기 시작하면, 그 자리에 머무는 것 자체가 손해가 됩니다.
이런 구조의 게임에서는 화면 구석을 등지는 것이 대체로 유리합니다. 등 뒤가 벽이면 신경 쓸 방향이 줄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사방이 열린 교차로 한가운데에 서 있으면 어디서 나올지 알 수 없어 가장 위험합니다.
또 하나 조심할 것은 총알을 아무 데나 뿌리는 습관입니다. 화면에 나가 있는 총알 수에 제한이 걸리는 구조라, 헛방을 남발하면 정작 급할 때 총알이 나가지 않습니다. 적이 사거리에 들어올 때까지 참는 편이 안전합니다.
키트 게임이라는 물건
이 게임처럼 다른 회사 기판 위에 얹어 파는 물건은 그 시절 미국에 꽤 많았습니다. 오락실 주인 입장에서는 손님이 질린 기계를 싼값에 새 게임으로 바꿀 수 있었고, 만드는 쪽은 기판을 설계할 필요 없이 롬만 준비하면 되니 원가가 낮았습니다.
대신 한계도 뚜렷했습니다. 원래 기판이 가진 성능 안에서만 만들 수 있으니 화면 구성과 소리가 어딘가 그 기판 시절 그대로입니다. 이 게임 역시 화면을 보면 훨씬 앞선 시기의 기판에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 티가 납니다. 색이 어긋난 채로 보존된 판본도 남아 있어, 지금 돌려 보면 색감이 이상하게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시절 첩보물 분위기
1980년대는 첩보 영화의 인기가 게임에도 그대로 옮겨 오던 시기입니다. 정식 판권을 받은 게임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판권 없이 분위기만 빌려 왔습니다. 제목에 요원이나 비밀 같은 단어를 붙이고, 정장 입은 사람 그림을 캐비닛에 붙이면 그것으로 첩보물이 되던 시절입니다.
그런 게임들은 대체로 내용이 장르 관습을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 게임도 마찬가지로, 첩보라는 포장을 걷어 내면 미로 안에서 쏘고 줍는 오래된 형식이 남습니다. 다만 그 포장이 그 시절 오락실에서는 손님을 끄는 확실한 수단이었다는 점은 기억할 만합니다.
지금 해 볼 만한가
한국 오락실에서 이 게임을 봤다는 기억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미국 시장을 겨냥한 키트였고 물량 자체가 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게임은 추억으로 찾기보다, 그 시절 오락실 업계가 어떻게 굴러갔는지를 보여 주는 표본으로 접근하는 편이 맞습니다.
규칙이 단순하니 잡자마자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고, 한 판이 짧아 몇 번 죽어도 부담이 없습니다. 기판 하나로 여러 게임을 돌려 쓰던 시절의 흔적을 직접 만져 보고 싶다면 한 번쯤 켜 볼 만한 물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