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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사이트 이브

패러사이트 이브 (Parasite Eve USA Disc 1) · 1998 · Squ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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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이브의 오페라 극장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관객으로 가득 찬 맨해튼의 오페라 극장, 무대 위 프리마돈나가 노래를 시작하자 객석의 사람들이 하나둘 불길에 휩싸여 재가 되어 무너집니다. 게임의 오프닝이 이렇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데이트하러 온 여형사 아야 브레아만이 멀쩡히 살아남고, 무대 위의 여배우 멜리사는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변해 있습니다. 첫 10분 만에 이 게임이 어떤 종류의 이야기인지 확실하게 못을 박아 버립니다.

당시 스퀘어의 RPG라 하면 검과 마법의 판타지가 상식이었는데, 이 게임은 현대 뉴욕의 경찰서와 병원과 지하철을 무대로 삼았습니다. 플레이스테이션 세대에게 이 첫인상은 꽤 충격적이었습니다.

패러사이트 이브 RPG 게임 화면 1 - 플레이스테이션 (1998)

미토콘드리아가 주인공인 RPG

패러사이트 이브(Parasite Eve)는 스퀘어가 플레이스테이션으로 낸 액션 RPG입니다. 일본 작가 세나 히데아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되, 소설의 뒷이야기에 해당하는 속편 격 시나리오를 게임으로 만들었습니다. 플레이어는 뉴욕 경찰 아야 브레아가 되어 크리스마스 이브부터 엿새 동안 벌어지는 사건을 쫓습니다.

핵심 소재는 미토콘드리아입니다. 세포 안에서 에너지를 만드는 이 작은 소기관이 스스로 의지를 갖고 숙주인 인간을 지배하려 든다는 설정인데, 실제 세포생물학 용어가 그대로 튀어나오는 대사가 많아 당시로서는 굉장히 이질적이면서도 그럴듯했습니다. 적으로 나오는 것들도 괴수가 아니라 개, 쥐, 새, 악어처럼 미토콘드리아가 폭주한 평범한 동물들이라 오히려 더 섬뜩합니다.

패러사이트 이브 RPG 게임 화면 2 - 플레이스테이션 (1998)

액션과 커맨드가 섞인 전투

전투 방식이 독특합니다. 적을 만나면 화면이 전환되어 원형 필드에서 싸우는데, 그 안에서 아야를 실시간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적의 공격을 직접 피해 다니다가 화면 오른쪽의 AT 게이지가 차면 그때 멈춰서 사격 명령을 내리는 방식입니다. 즉 턴제의 뼈대에 액션의 회피를 얹은 형태로, 파이널 판타지의 액티브 타임 배틀을 반쯤 액션으로 풀어 놓은 셈입니다.

사격할 때는 사거리 안에 들어온 적을 조준해 여러 발을 나눠 쏠 수 있고, 총기에 따라 사거리 범위의 모양이 다릅니다. 여기에 패러사이트 에너지라는 초능력이 붙습니다. 회복하는 힐, 방어를 올리는 배리어, 적을 태우는 에너지 샷 같은 것들인데, 아야 자신의 미토콘드리아가 각성한 결과라는 설정이라 스토리와 시스템이 맞물립니다.

무기 개조와 아이템 관리

이 게임의 깊이는 무기 개조에 있습니다. 권총, 산탄총, 기관단총, 유탄발사기 등 실총 계열 무기가 나오는데, 툴 아이템을 써서 한 무기의 능력치와 특수 효과를 다른 무기로 옮길 수 있습니다. 공격력 높은 총에다 다른 총의 연사나 산탄, 상태이상 효과를 이식해 자기만의 주력 무기를 만드는 재미가 상당합니다. 방어구도 같은 방식으로 개조합니다.

아이템 창은 칸이 정해져 있어서 무엇을 챙기고 무엇을 버릴지 늘 고민하게 됩니다. 회복약과 탄약, 개조용 툴이 자리를 다투기 때문에 초반에는 특히 빠듯합니다.

뉴욕이라는 무대와 크라이슬러 빌딩

무대가 실제 지명이라는 점도 인상적입니다. 센트럴 파크, 뉴욕 경찰서, 소호, 지하철, 자연사 박물관, 병원, 그리고 마지막의 크라이슬러 빌딩까지 엿새 동안 도시를 돌아다닙니다. 게임 안의 뉴욕 경찰서는 책상 서랍 하나까지 조사할 수 있을 만큼 공들여 만들어져 있어서, 사건이 진행될수록 이곳이 점점 텅 비어 가는 모습이 이야기의 압박감을 더합니다.

본편을 끝내면 크라이슬러 빌딩 77층 던전이 열립니다. 한 층씩 올라가며 랜덤하게 배치된 적을 처리하는 고난도 추가 요소로, 무기 개조를 극한까지 밀어붙여야 꼭대기를 볼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도달한 사람만 볼 수 있는 진엔딩도 준비되어 있어서, 클리어 후에도 오래 붙잡게 만드는 게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