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
패스 (Pass) · 1992 · Ok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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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회사가 만든 오락실 기판
1990년대 초 한국 오락실을 채운 기판은 대부분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틈에서 국내 업체들이 직접 기판을 만들어 내놓던 시기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옥산도 그런 이름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금은 자료를 찾기도 어렵고 기억하는 사람도 드물지만, 당시에는 동네 오락실 한쪽 구석에 이런 국산 기판이 슬쩍 끼어 있곤 했습니다.
이런 게임들은 대개 일본 대작을 흉내 내되 규모를 줄이고, 대신 한 판이 짧고 손이 편하도록 다듬는 방향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큰 회사가 쏟는 개발비를 감당할 수 없으니 아이디어 하나로 승부를 봐야 했습니다.
어떤 게임인가
패스(Pass)는 한정된 화면 안을 돌아다니며 정해진 목표를 채워 다음 판으로 넘어가는 구조의 액션 게임입니다. 화면이 옆으로 흐르지 않고 한 판이 한 화면 안에서 끝나는 형태라,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눈에 다 들어옵니다. 규칙을 따로 배울 필요 없이 몇 초만 움직여 보면 하는 일이 파악됩니다.
조작은 레버로 움직이고 버튼으로 행동하는 정도입니다. 이런 형태의 게임은 조작의 깊이보다 판단 속도로 승부가 갈립니다. 화면 어디부터 손을 대야 효율이 좋은지, 어느 길로 돌아야 쫓기지 않는지를 정하는 것이 실력입니다.
한 판을 푸는 요령
처음 잡으면 대개 눈에 보이는 대로 가까운 것부터 처리하다가 구석에 몰립니다. 이런 게임의 기본은 반대입니다. 먼저 화면을 크게 한 바퀴 돌면서 도망칠 길을 확보해 두고, 그다음에 안쪽을 정리합니다. 나갈 구멍이 두 개 이상 남아 있으면 웬만해서는 죽지 않습니다.
두 번째 요령은 방해 요소의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화면 전체를 흐릿하게 보면서 내 주변 몇 칸만 신경 쓰는 편이 훨씬 안정적입니다. 하나하나 쫓다 보면 정작 뒤에서 붙는 것을 놓칩니다.
막히는 지점은 대체로 후반부에 방해 요소가 늘어나면서 안전한 자리가 사라질 때입니다. 이때는 남은 목표를 다 채우려고 욕심내기보다, 가장 위험한 구역을 먼저 비워 놓고 안전해진 다음에 나머지를 처리하는 순서가 낫습니다. 순서만 바꿔도 통과율이 달라집니다.
같은 시기 다른 게임들과 견주면
한 화면 안에서 목표를 채워 다음 판으로 넘어가는 구조는 오락실 게임의 오래된 뼈대입니다. 1980년 팩맨이 만든 틀이 십 년 넘게 수없이 변주되었고, 국내외의 작은 회사들이 그 틀 위에 각자의 규칙을 얹어 게임을 만들었습니다. 이 게임도 그 흐름 안에 놓입니다.
다만 1992년이면 이미 스트리트 파이터 2가 오락실을 뒤집어 놓은 뒤였습니다. 손님들이 대전격투 앞에 줄을 서는 시기에, 이런 단순한 구조의 게임이 자리를 차지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기판들은 대개 오래 남지 못하고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격투 게임에 지쳤을 때 잠깐 손을 풀기에는 이런 게임이 좋습니다. 상대와 겨루는 긴장 없이, 화면 하나를 정리하는 단순한 만족감만 있습니다.
국산 기판이 남긴 자리
한국의 아케이드 개발은 짧고 굵게 지나갔습니다. 몇몇 회사가 자체 기판을 만들어 국내와 해외에 내놓았고, 그 가운데 일부는 지금도 이름이 남아 있지만 대부분은 자료조차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채 흩어졌습니다. 만든 회사가 어떤 곳이었는지, 몇 명이 만들었는지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가 흔합니다.
그래도 이런 게임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록입니다. 당시 국내 업체가 어느 정도 수준의 기판을 다룰 수 있었는지, 어떤 게임을 참고했는지, 무엇을 재미로 봤는지가 화면 안에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게임이 잘 만들어졌느냐와 별개로, 이 화면이 남아 있는 것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눌러 보면 조작감은 투박하고 그림도 소박합니다. 하지만 몇 판 돌리다 보면 왜 이런 구조가 오랫동안 반복되었는지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규칙이 한 줄이고, 실패해도 다시 시작하는 데 몇 초가 걸리지 않는다는 것. 오락실 게임의 기본은 늘 거기에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