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즈 레어 메가CD판
드래곤즈 레어 (Dragon S Lair) · 1993 · ReadySoft
게임 화면 하단에서 —키 변경 Controls Settings·저장·불러오기 Save State / Load State
게임을 켰는데 화면에서 만화 영화가 돌아갑니다. 도트로 찍은 그림이 아니라, 손으로 그린 셀 애니메이션이 그대로 재생됩니다. 기사 더크가 함정에 빠지고 괴물에게 쫓기는 장면이 극장에서 보던 것과 같은 그림으로 흐르는데, 어느 순간 화면이 반짝하고 플레이어는 정해진 방향키나 버튼을 눌러야 합니다. 늦으면 더크는 그 자리에서 처참하게 죽습니다.
드래곤즈 레어(Dragon's Lair)는 1983년 오락실에서 레이저디스크를 써서 등장해 화제를 모은 게임이며, 이 메가 CD판은 레디소프트가 1993년에 옮긴 것입니다. 애니메이터 돈 블루스가 그린 영상을 재생하면서, 정해진 순간에 정해진 입력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지금 흔히 말하는 즉석 반응 입력의 원형이 되는 게임입니다.
이 게임이 요구하는 것
일반적인 게임처럼 캐릭터를 자유롭게 조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상이 흐르다가 위험이 닥치면 아주 짧은 순간 입력을 받는 창이 열리고, 그때 올바른 방향이나 버튼을 눌러야 다음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틀리거나 놓치면 더크가 죽는 영상이 재생되고 목숨이 하나 줄어듭니다.
문제는 무엇이 올바른 입력인지 미리 알 방법이 사실상 없다는 점입니다. 화면에 반짝이는 물체나 위험 요소를 보고 유추할 수는 있지만, 확실하게 아는 방법은 한 번 죽어 보고 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게임은 실력으로 뚫는 게임이 아니라 순서를 외우는 게임에 가깝습니다.
한 번 외우고 나면 진행은 빠릅니다. 각 장면에서 눌러야 할 것이 정해져 있으니, 순서만 몸에 익으면 막힘없이 이어집니다. 오락실 시절에는 이 순서를 아는 사람이 뒤에서 훈수를 두고, 그걸 받아 적어 다니는 일도 흔했습니다.
성에서 벌어지는 일
이야기는 단순합니다. 용에게 붙잡힌 공주를 구하러 기사 더크가 마법사의 성에 들어갑니다. 성 안에는 무너지는 다리, 살아 움직이는 무기, 소용돌이치는 물, 촉수가 뻗는 방 같은 것들이 이어지고, 각각이 하나의 짧은 장면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각 장면은 그 자체로 완결된 애니메이션이라 보는 재미가 큽니다. 특히 실패했을 때 나오는 죽는 장면들이 하나같이 공들여 그려져 있어서, 일부러 틀려 가며 죽는 장면을 다 보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게임이라기보다 상호작용하는 만화 영화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이유입니다.
장면 순서는 매번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방을 도는 순서가 섞이는 구간이 있어서, 통째로 순서를 외웠다고 방심하면 다른 방이 나와 당황하게 됩니다. 그래서 실제로 필요한 것은 전체 순서가 아니라 각 방마다 무엇을 눌러야 하는지를 방 단위로 외우는 것입니다.
메가 CD로 옮기면서
이 게임을 가정용으로 옮기는 것은 오랫동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원본이 레이저디스크에 담긴 영상이라, 그만한 용량과 재생 능력이 있는 기기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CD를 붙인 기기들이 나오면서 비로소 제대로 된 이식이 가능해졌고, 메가 CD판도 그 흐름 속에 나왔습니다.
다만 기기의 한계는 그대로 드러납니다. 메가드라이브 계열의 색 표현 능력 안에서 영상을 압축해 넣어야 했으므로, 원본보다 화면이 거칠고 색이 뭉개집니다. 화면 크기도 원래보다 작게 잡혀 있습니다. 그럼에도 당시 기준으로는 집에서 이 영상이 돌아간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레디소프트는 이 게임을 여러 기기로 옮긴 회사로, 컴퓨터판과 다른 콘솔판도 같은 회사 손을 거쳤습니다. 판마다 영상 품질과 조작 반응이 조금씩 다르고, 그 차이가 체감 난이도에도 영향을 줍니다.
게임 역사에서의 자리
1983년 오락실에 이 게임이 처음 놓였을 때의 충격은 상당했습니다. 주변 기계들이 전부 네모난 도트로 그린 화면이던 시절에 혼자만 만화 영화를 틀고 있었으니, 사람들이 몰려 구경만 하는 일도 흔했습니다. 동전도 다른 게임보다 더 받았습니다.
하지만 게임으로서의 수명은 짧았습니다. 화면은 화려한데 실제로 하는 일은 정해진 타이밍에 버튼을 누르는 것뿐이라, 신기함이 가시면 남는 것이 적었습니다. 레이저디스크 게임이라는 갈래 자체가 몇 년 만에 시들해진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이 게임이 남긴 즉석 반응 입력이라는 방식은 훨씬 뒤의 게임들에서 다시 살아나 하나의 관습이 되었습니다.
국내에서는 오락실에서 실물 기계를 본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대신 나중에 컴퓨터나 콘솔 이식판으로 접한 사람들이 있고, 화면만 보고 이게 게임이 맞나 싶어 하다가 몇 번 죽고 나서야 규칙을 깨닫는 과정을 똑같이 거칩니다. 잘하기 어려운 게임이지만, 한 번쯤은 그 그림을 직접 굴려 볼 만한 물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