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프 월드
라프 월드 (Raf World Japan) · 1990 · Sunsoft
게임 화면 하단에서 —키 변경 Controls Settings·저장·불러오기 Save State / Load State
터미네이터가 될 뻔했던 게임
이 게임에는 제법 알려진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원래는 어느 유명한 영화의 판권을 받아 만들던 작품이었습니다. 미래에서 온 기계와 싸우는 그 영화 말입니다. 그런데 개발 도중에 판권 문제가 어그러졌고, 이미 만들어 둔 게임을 버릴 수는 없으니 설정과 캐릭터만 갈아 끼워 전혀 다른 작품으로 내놓았습니다.
그 흔적이 화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금속 골격이 드러난 인간형 기계, 회색빛 지하 통로, 파괴된 도시의 실루엣, 그리고 유난히 건조한 분위기까지 그렇습니다. 8비트 게임 특유의 밝고 아기자기한 색을 쓰지 않고 어둡고 차가운 색으로 화면을 채운 이유가, 원래 이 게임이 무엇이 되려 했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사고로 태어난 작품인데 결과물이 오히려 개성 있는 경우입니다.
어떤 게임인가
라프 월드(Raf World)는 옆으로 흐르는 화면을 뛰고 쏘며 나아가는 액션 슈팅입니다. 서구에서는 다른 제목을 달고 나왔지만 내용은 같습니다. 주인공은 우주 식민지의 폭발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청년이고, 그 사고 뒤에 숨은 기계 무리를 쫓아 다섯 개의 구역을 차례로 돌파합니다. 조작은 이동과 점프, 사격, 그리고 무기 교체가 전부입니다.
한 구역의 흐름은 전형적입니다. 발판을 밟고 올라가며 앞뒤에서 나오는 적을 처리하고, 사다리와 승강기로 층을 옮기고, 끝에 있는 방에서 커다란 기계와 마주칩니다. 특별한 수집 요소나 갈림길은 없고, 오로지 앞으로 나아가는 구조입니다. 그만큼 진행이 명료하고, 죽는 이유도 늘 분명합니다.
총을 바꿔 가며 씁니다
기본 총은 탄이 무한이지만 위력이 약합니다. 진행하면서 얻는 특수 무기는 따로 있는 게이지를 나눠 씁니다. 넓게 퍼져 나가는 것, 벽을 무시하고 적을 따라가는 것, 곧게 뻗어 나가며 여럿을 꿰뚫는 것, 폭발을 일으키는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게이지는 아이템으로만 채워지기 때문에, 강한 무기를 아무 데나 쓰면 정작 필요할 때 기본 총만 남습니다.
이 구성이 게임의 리듬을 만듭니다. 잡졸은 기본 총으로 성실하게 처리하고, 화면을 가득 채우는 보스 앞에서 아껴 둔 무기를 꺼내는 것이 정석입니다. 특히 추적 성능이 있는 무기는 몸을 피하는 데 집중하면서도 공격을 이어 갈 수 있어서, 몇몇 보스는 이걸 들고 들어가느냐 아니냐로 체감 난이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음악이 먼저 기억나는 게임
이 회사가 만든 8비트 게임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음악입니다. 라프 월드도 마찬가지입니다. 첫 구역에 들어서는 순간 흘러나오는 곡은 베이스 라인이 앞에 나서서 곡 전체를 끌고 갑니다. 8비트 음원에서 저음을 이렇게 두툼하게 뽑아낸 사례가 흔치 않아서, 게임 내용은 잊었어도 이 곡만은 기억한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곡들은 밝지 않습니다. 어둡고 반복적이고, 어딘가 쫓기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화면의 차가운 색감과 맞물려서, 이 게임이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지 대사 한 줄 없이도 전해집니다. 음악만 따로 들어도 완성된 곡처럼 들리는 경우인데, 이 시절 8비트 게임에서는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짧지만 만만치 않습니다
구역이 다섯 개뿐이라 전체 길이는 짧습니다. 익숙해지면 삼십 분 안쪽에 끝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익숙해지기까지가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적의 공격이 아프고, 발판 사이 간격이 야박하고, 화면 밖에서 갑자기 날아오는 탄이 많습니다. 특히 좁은 발판 위에서 뒤로 밀려나 떨어지는 죽음이 계속 반복됩니다.
요령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새 화면으로 넘어갈 때 무작정 뛰어들지 않고 가장자리에 서서 적이 나오는 위치를 먼저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 게임의 적 배치는 고정이라 한 번 보면 다음부터는 대처가 됩니다. 둘째, 발판 위에서는 되도록 안쪽에 서는 것입니다. 피격당했을 때 밀려나는 거리를 감안하면 한두 걸음의 여유가 목숨을 살립니다.
보스는 대체로 패턴이 정직합니다. 두세 가지 동작을 순서대로 반복하므로, 한 바퀴를 지켜보고 나면 안전한 자리와 때릴 타이밍이 보입니다. 조급하게 붙지 말고 한 사이클을 관찰하는 것이 결국 가장 빠른 길입니다.
그 시절 이 회사의 자리
이 게임을 만든 곳은 8비트 시절 내내 기술력으로 이름을 얻은 회사였습니다. 음원을 다루는 솜씨, 어두운 화면을 색 몇 개로 그럴듯하게 만들어 내는 감각, 그리고 액션 게임의 손맛에서 꾸준히 좋은 결과를 냈습니다. 이 작품은 그 회사가 8비트 기계에서 보여 줄 수 있는 것을 거의 끝까지 밀어붙인 시점의 결과물입니다.
국내에서는 정식으로 유통되지 않았고, 다른 인기작에 묻혀 이름을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여러 게임을 담은 복사 팩을 통해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있었고, 그런 경우 대개 첫 구역 음악 때문에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길이가 짧고 규칙이 단순해서, 지금 처음 잡아도 부담 없이 끝까지 가 볼 만한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