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이닝 앤 더 다크니스
샤이닝 앤 더 다크니스 (Shining in the Darkness USA Europe) · 1991 · Se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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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하나 돌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는 던전
이 게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건 스토리도 캐릭터도 아니고 그 캄캄한 통로입니다. 화면 가운데에 돌벽이 크게 그려져 있고, 방향키를 누르면 한 칸씩 앞으로 나아갑니다. 갈림길에서 몸을 돌리면 화면이 통째로 회전하는데, 그 짧은 순간에 방향 감각이 홀랑 날아갑니다. 그래서 이 게임을 제대로 하던 사람들은 손에 모눈종이를 들고 있었습니다. 한 칸 갈 때마다 네모를 하나씩 칠하고, 벽이 있으면 선을 긋고, 계단을 찾으면 동그라미를 쳐 뒀습니다.
무서운 건 어둠 자체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 아무 예고 없이 튀어나오는 전투 화면입니다. 걷다가 갑자기 화면이 번쩍하면서 몬스터 그림이 커다랗게 뜨는데, 체력이 간당간당한 채로 출구를 찾아 헤매던 중이라면 그 한 번의 조우가 그대로 전멸로 이어집니다. 이 긴장감이 이 게임의 전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어떤 게임인가
샤이닝 앤 더 다크니스(Shining in the Darkness)는 1인칭 시점으로 미로 같은 던전을 탐험하는 롤플레잉 게임입니다. 주인공은 왕국의 공주와 자기 아버지가 실종된 사건을 쫓아 성 아래로 이어진 거대한 미궁으로 들어갑니다. 마을에서 무기와 방어구를 사고, 던전으로 내려가 싸우고, 죽기 전에 돌아 나와 회복하고 다시 내려가는 것이 한 판의 흐름입니다.
전투는 턴제입니다. 공격, 마법, 아이템, 방어, 도주 중에서 고르면 이쪽과 상대가 순서대로 행동합니다. 화면 아래쪽에는 세 명의 파티원이 서 있고, 위쪽 큰 창에는 적의 그림이 그려집니다. 손이 빠를 필요는 전혀 없고, 대신 지금 내려가도 되는 깊이인지, 회복 아이템이 몇 개 남았는지를 계산하는 판단이 전부입니다.
세 명이 한 팀
주인공 혼자 시작하지만 곧 두 명의 동료가 합류합니다. 힘이 세고 몸이 튼튼한 전사 계열과, 공격 마법과 회복 마법을 담당하는 마법사 계열이 붙어서 균형이 잡힙니다. 주인공은 그 중간쯤 되는 능력치에 무기 선택 폭이 가장 넓습니다.
파티 구성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고민할 거리는 오히려 장비 쪽에 있습니다. 던전에서 주운 무기가 지금 든 것보다 좋은지 나쁜지 바로 알기 어렵고, 누구에게 채워야 하는지도 갈립니다. 돈이 늘 부족하니까 세 명 것을 한꺼번에 갈아 끼우지 못하고, 앞줄에서 맞는 사람 방어구부터 챙기게 됩니다.
회복 마법을 쓸 수 있는 동료의 마력 잔량이 곧 탐험 가능 시간입니다. 마력이 바닥나면 아무리 체력이 남아 있어도 돌아 나오는 게 맞습니다. 이걸 무시하고 욕심을 부리다 미로 한복판에서 전멸하는 게 이 게임의 가장 흔한 죽음입니다.
처음 하는 사람이 막히는 곳
첫 번째 벽은 지도입니다. 게임 안에 자동 지도가 없어서,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려주는 장치가 사실상 없습니다. 요령은 단순합니다. 갈림길을 만나면 항상 같은 쪽 벽만 따라가는 것입니다. 왼손을 벽에 대고 걷는다고 생각하고 계속 왼쪽으로만 붙어 돌면, 느리긴 해도 언젠가는 막다른 곳과 계단을 전부 찾게 됩니다.
두 번째 벽은 돈입니다. 초반에는 장비값이 터무니없이 비싸 보입니다. 여기서 무리해서 깊이 들어가지 말고, 입구 근처 몇 층을 반복해서 돌며 레벨과 돈을 함께 올리는 편이 결국 빠릅니다. 이 게임은 한 층만 더 내려가면 적의 세기가 눈에 띄게 달라지기 때문에, 준비 없이 내려간 대가가 즉시 돌아옵니다.
세 번째는 귀환 수단입니다. 마을로 단번에 돌아가는 수단을 확보하기 전과 후는 체감 난이도가 완전히 다릅니다. 그걸 손에 넣기 전까지는 들어간 만큼 걸어 나와야 하니, 탐험 시간의 절반은 항상 돌아 나올 몫으로 남겨 둬야 합니다.
시리즈의 출발점
이 작품은 이후 오래 이어진 샤이닝 시리즈의 첫 번째입니다. 다음 작품부터는 칸을 나눈 지형에서 부대를 움직이는 시뮬레이션 전투로 방향을 크게 틀었기 때문에, 1인칭 던전 탐험이라는 형태를 가진 것은 이 작품이 거의 유일합니다. 시리즈 팬이 뒤늦게 이 게임을 잡았다가 전혀 다른 물건이라 당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대신 캐릭터 그림체와 몬스터 디자인, 마을의 분위기 같은 것들은 이후 작품으로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큼직하고 선이 굵은 몬스터 그림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연출은 당시 16비트 기기에서 보기 드물게 인상적이었고, 그 덕에 전투 화면 자체가 이 게임을 기억하게 만드는 장면이 되었습니다.
지금 다시 해 보면
요즘 감각으로 보면 걸음이 느리고 친절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불친절이 곧 재미이기도 합니다. 종이에 직접 그린 지도가 한 층씩 완성되어 갈 때의 성취감은 자동 지도가 있는 게임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시간이 넉넉할 때 종이 한 장 옆에 두고 천천히 파고들기에 어울리는 게임입니다.
조작이 단순해서 규칙을 익히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방향키로 걷고 돌고, 전투에서는 목록에서 고르기만 하면 됩니다. 어려운 건 손이 아니라 인내심 쪽이라, 짬이 날 때마다 조금씩 지도를 넓혀 가는 식으로 붙잡기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