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티마: 성자에의 길
울티마: 성자에의 길 (Ultima Quest of the Avatar USA) · 1990 · F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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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RPG는 마왕을 쓰러뜨리면 끝납니다. 이 게임은 다릅니다. 마지막에 기다리는 것은 최종 보스가 아니라, 플레이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판정입니다. 거짓말을 했는지, 도망친 적이 있는지, 가난한 사람에게 적선을 했는지, 상인을 속이고 싼값에 물건을 샀는지가 전부 기록되고, 그것이 곧 게임의 진행도가 됩니다. 1980년대 후반의 게임이 이런 걸 목표로 삼았다는 사실 자체가 지금도 놀랍습니다.
울티마: 성자에의 길(Ultima: Quest of the Avatar)은 서양 컴퓨터 RPG의 고전을 패미컴으로 옮긴 롤플레잉 게임입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대륙을 돌아다니고, 마을에서 사람들과 대화하고, 던전에 들어가 싸우고, 파티를 꾸려 나가는 기본 흐름은 익숙합니다. 다만 그 위에 얹힌 목표가 완전히 다릅니다.
여덟 가지 덕이라는 목표
이 게임의 중심에는 여덟 개의 덕목이 있습니다. 각각의 덕목에는 대응하는 도시와 성지가 있고, 플레이어의 행동에 따라 덕목 수치가 오르내립니다. 예를 들어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싸우면 용기가 오르고, 가진 것을 나누면 자비가 오르는 식입니다. 반대로 상인에게 값을 속이거나, 이미 항복한 적을 베거나, 대화에서 거짓을 말하면 수치가 깎입니다.
이 수치들이 모두 충분히 올라야 각 성지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고, 여덟 가지 모두를 채운 다음에야 최종 목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게임의 진짜 공략은 "어디서 레벨을 올리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처신하는가"입니다.
문제는 게임이 이걸 친절하게 알려 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화면 어디에도 덕목 수치가 대놓고 나오지 않고, 무엇이 감점인지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말을 흘려듣고 다니면 한참 뒤에야 자기가 뭘 잘못하고 있었는지 알게 됩니다.
대화가 곧 공략입니다
이 게임에서 마을 사람과의 대화는 분위기용 대사가 아니라 실제 정보입니다. 특정 단어를 물어봐야 다음 단서가 나오고, 그 단서가 다시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단어가 됩니다. 필요한 주문 재료의 위치, 성지의 좌표, 열쇠가 되는 문장이 전부 이렇게 사람들의 입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이 게임은 메모를 하면서 하는 게임입니다.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적어 두지 않으면 금세 길을 잃습니다. 실제로 이 계열의 서양 RPG들은 플레이어가 종이에 지도와 단어를 적어 가며 진행하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도 여기서 걸립니다. 대화 중 선택지에서 편한 대답을 고르면 덕목이 깎일 수 있어서,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하게 답하는 편이 결과적으로 이득입니다.
패미컴판이 달라진 점
원작은 컴퓨터용 게임이었고, 패미컴판은 그것을 가정용 기기의 화면과 조작에 맞게 다시 만든 결과물입니다. 그래픽이 손질되고 전투 화면과 인터페이스가 콘솔에 맞게 정리되었으며, 원작에는 없던 연출도 들어갔습니다.
덕분에 원작보다 접근하기가 훨씬 수월합니다. 다만 원작이 가지고 있던 자유도나 세밀한 부분은 일부 정리되었고, 콘솔 RPG에 익숙한 사람이 보기에도 여전히 불친절한 구석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목적지를 찍어 주는 표시가 없고, 넓은 세계를 스스로 뒤져야 합니다.
전투 자체는 이 게임의 중심이 아닙니다. 몬스터를 잡아 돈과 경험을 모으는 과정은 어디까지나 여정을 이어 가기 위한 수단이고, 게임이 요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덕목입니다.
처음 하는 사람이 막히는 곳
가장 흔한 벽은 "다 했는데 왜 안 되지"입니다. 여덟 덕목 중 한둘이 모자란 상태로 성지에 가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무엇이 모자란지 화면이 말해 주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자신이 최근에 어떤 행동을 했는지 되짚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흔한 것이 세계의 크기입니다. 대륙과 던전이 넓고 이동 수단이 제한적이라, 목적 없이 돌아다니면 시간만 소모합니다. 마을에서 얻은 단서를 정리해 두고 목적지를 정한 다음 움직여야 합니다.
시작 단계에서 캐릭터의 직업이 정해지는 과정도 특이합니다. 몇 가지 상황을 놓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처음 직업이 결정되는데, 이 자체가 이미 덕목을 묻는 장치입니다.
왜 기억되는가
국내에서는 이 게임이 널리 퍼진 축은 아닙니다. 영어 텍스트가 많고 진행이 불친절해서, 같은 시기의 다른 콘솔 RPG들만큼 사랑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게임이 지금까지 이야기되는 이유는 목표 설정 하나 때문입니다. 강해져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살아서 인정받는 것을 결말로 삼은 RPG는 그때도 드물었고 지금도 흔하지 않습니다. 한 시간만 붙잡고 있어도 이 게임이 다른 곳을 보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