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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지 볼

크레이지 볼 (Krazy Bowl) · 1994 · American Sam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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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실에 놓인 트랙볼 볼링대

레버가 아니라 커다란 공이 박혀 있는 조작부를 만나면 반갑습니다. 손바닥으로 트랙볼을 굴려 공을 던지는 볼링 게임은 미국 오락실의 오랜 단골이었고, 이 게임도 그 계보에 있습니다. 손목의 세기와 방향, 그리고 굴리는 순간의 각도가 그대로 공의 궤적이 되기 때문에, 버튼 몇 개로 타이밍을 맞추는 방식의 볼링 게임과는 손맛 자체가 다릅니다.

크레이지 볼(Krazy Bowl)은 1994년 아메리칸 새미가 내놓은 10핀 볼링 아케이드 게임입니다. 트랙볼과 버튼 세 개로 조작하며 둘이서 번갈아 칠 수 있습니다. 기판 설정에 따라 트랙볼 대신 레버로도 즐길 수 있게 되어 있고, 이 경우에는 던지기용 버튼이 하나 추가되는 구성으로 바뀝니다.

크레이지 볼 스포츠 게임 화면 1 - 오락실 (1994)

두 가지 모드

이 게임에는 성격이 다른 두 가지 모드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규정 모드로, 실제 볼링 규칙 그대로 열 프레임을 돌면서 스트라이크와 스페어를 노리는 정통 방식입니다. 볼링을 아는 사람이면 별도 설명 없이 바로 이해할 수 있고, 점수 계산도 실제 볼링과 같은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다른 하나는 스위퍼 모드입니다. 여기서는 프레임마다 핀이 평범한 삼각형이 아니라 제각기 다른 형태로 배치됩니다. 일자로 늘어서기도 하고, 양쪽으로 갈라져 있기도 하고, 듬성듬성 흩어져 있기도 합니다. 배치에 따라 점수 계산도 달라져서, 규정 모드가 정확한 반복이라면 스위퍼 모드는 매번 새로운 문제를 푸는 쪽에 가깝습니다. 오락실 볼링 게임이 실제 볼링보다 재미있어지는 지점이 대개 이런 변형 모드입니다.

한 판이 짧게 끝나기 때문에 둘이 나란히 앉아 번갈아 치기 좋습니다. 실제 볼링장처럼 순서를 기다리는 시간도 짧고, 잘못 던져도 다음 공이 금방 옵니다.

크레이지 볼 스포츠 게임 화면 2 - 오락실 (1994)

트랙볼을 다루는 요령

처음 하는 사람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공을 너무 세게 굴리는 것입니다. 힘껏 밀면 속도는 붙지만 방향 제어가 어려워지고, 그 결과 대부분 도랑으로 빠집니다. 볼링 게임에서 속도는 스트라이크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적당한 속도로 정확한 각도를 만드는 편이 점수가 훨씬 잘 나옵니다.

두 번째 요령은 방향을 손목이 아니라 팔 전체로 만드는 것입니다. 트랙볼을 굴릴 때 손목만 비틀면 굴리는 도중에 각도가 흔들려 의도하지 않은 커브가 걸립니다. 팔을 곧게 밀되, 마지막에 살짝 방향을 얹는다는 느낌으로 굴리면 궤적이 안정됩니다.

세 번째는 스페어 처리입니다. 스트라이크를 못 냈을 때 남은 핀을 정리하는 것이 점수의 핵심인데, 특히 좌우 끝에 한두 개만 남은 상황이 어렵습니다. 이때는 정면에서 겨누기보다 반대편 끝에서 대각선으로 밀어 넣는 각을 잡는 편이 성공률이 높습니다. 실제 볼링에서 쓰는 요령이 게임 안에서도 그대로 통합니다.

크레이지 볼 스포츠 게임 화면 3 - 오락실 (1994)

아메리칸 새미와 스포츠 아케이드

아메리칸 새미는 일본 새미의 북미 법인으로, 90년대 미국 오락실 시장을 겨냥한 기판을 다루던 곳입니다. 이 게임이 모토로라 68000 계열 CPU 와 세타 계열 사운드 칩을 쓰는 구성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화려한 3D 연출을 앞세운 물건이 아니라 조작 장치의 감각으로 승부하는 유형의 게임입니다.

90년대 미국 오락실에는 이런 스포츠 캐비닛이 늘 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트랙볼을 쓰는 볼링과 골프, 총을 든 사격 게임, 농구 골대가 달린 기계가 술집과 볼링장, 피자 가게 한쪽에 놓여 있었습니다. 격투 게임처럼 오래 파고들 필요 없이, 술 한잔 마시다가 둘이 붙어 몇 판 하고 일어나는 소비 방식에 맞춰 설계된 것입니다. 이 게임의 짧은 판당 길이와 두 사람 대전 구조도 그런 환경을 전제로 합니다.

지금 해 보면

한국 오락실에서 트랙볼 캐비닛 자체가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게임을 국내에서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국내 오락실은 대전 격투와 슈팅, 퍼즐이 자리를 나눠 가졌고 스포츠 게임은 축구나 야구 쪽이 조금 있는 정도였습니다. 트랙볼을 굴려 보는 경험 자체가 낯선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해 보면 오히려 신선합니다. 규칙을 배울 것이 없어 곧바로 시작할 수 있고, 스위퍼 모드의 변칙 배치는 정통 볼링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짧은 시간에 한 판씩 끊어 즐기기 좋고, 옆 사람과 점수를 놓고 겨루기에도 적당한 부담입니다. 무거운 게임 사이에서 잠깐 손을 풀 때 꺼내 보기 좋은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