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이지 파이트
크레이지 파이트 (Crazy Fight) · 1996 · Subs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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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남은 기판
오락실 게임의 역사에는 이름과 기판만 남고 나머지는 흐릿한 작품이 많습니다. 크레이지 파이트(Crazy Fight)도 그런 쪽입니다. 1996년에 나온 1인용 아케이드 게임이고, 만든 곳은 대만의 서브시노라는 사실 정도가 확실하게 남아 있습니다. 잡지에 실린 적도, 크게 유행한 적도 없어서 지금 남아 있는 자료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게임은 화면을 직접 켜 보는 것이 가장 빠릅니다. 설명서도 공략도 없는 상태로 기계 앞에 앉는 것은, 사실 그 시절 오락실에서 흔하게 하던 일이기도 했습니다. 처음 보는 기판 앞에 앉아 레버를 흔들고 버튼을 눌러 보며 규칙을 알아내는 과정 자체가 오락실의 일부였습니다.
어떤 게임인가
이 게임은 한 명이 즐기는 아케이드 액션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화면 속 캐릭터를 조종해 적을 상대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당시 오락실에서 가장 흔했던 형태입니다. 레버로 움직이고 버튼으로 공격하는 기본 조작이면 첫 판은 충분히 돌려 볼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같은 시기 아시아권에서 만들어진 기판들은 대체로 비슷한 얼개를 가집니다. 목숨이 정해져 있고, 맞으면 하나씩 줄고, 다 떨어지면 동전을 더 넣어 이어서 할 수 있습니다. 정해진 구간을 넘길 때마다 적 배치가 조금씩 어려워지고, 몇 구간마다 덩치 큰 적이 나오는 식입니다.
처음 보는 기판을 파악하는 법
이름 모를 기판을 만났을 때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데모 화면을 끝까지 봅니다. 대부분의 아케이드 게임은 동전을 넣지 않아도 시연 장면과 조작 안내가 돌아가기 때문에, 여기서 목표와 조작을 절반쯤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은 버튼을 하나씩 눌러 보는 것입니다. 어떤 버튼이 공격이고 어떤 것이 점프나 특수 동작인지, 두 개를 같이 누르면 무엇이 나오는지를 첫 판에서 확인해 둡니다. 첫 판은 어차피 정보를 얻는 판이라고 생각하고 점수는 신경 쓰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마지막은 화면 정보를 읽는 것입니다. 위쪽에 숫자가 몇 개 붙어 있는지, 그것이 점수인지 남은 목숨인지 시간인지 확인하면 게임의 성격이 드러납니다. 시간 제한이 있는 게임이면 서둘러야 하고, 없다면 안전하게 한 마리씩 처리하는 쪽이 유리합니다.
서브시노와 1990년대 대만 기판
서브시노는 대만에 자리 잡은 기판 제조사로, 주로 카드와 릴을 다루는 종류의 기계를 오래 만들어 온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회사가 액션 게임을 내놓는 일은 드물지 않았습니다. 자체 기판이 이미 있으니 다른 종류의 게임을 얹어 보는 시도를 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웠기 때문입니다.
1990년대 중반은 대만과 홍콩, 중국의 여러 회사가 저마다 기판을 만들어 아시아 시장에 뿌리던 시기입니다. 일본 대형 회사의 기판은 비쌌고, 그 아래 시장을 이런 기판들이 채웠습니다. 만듦새는 들쭉날쭉했지만 값이 싸고 물량이 많아, 동네 오락실 구석에는 늘 이런 기계가 한두 대씩 있었습니다.
한국 오락실에 흘러들던 경로
이런 기판이 한국에 들어오는 길은 정식 유통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중고 기판을 묶음으로 들여와 기존 기계에 갈아 끼우는 방식이 흔했고, 그러다 보니 제목이 원래 것과 다르게 붙는 일도 있었습니다. 손님 입장에서는 어제 있던 게임이 오늘 다른 게임으로 바뀌어 있는 경험을 자주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 오락실 기억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게임이 유난히 많습니다. 분명히 해 봤고 화면도 기억나는데 제목을 모르는 게임들입니다. 크레이지 파이트 역시 그런 자리에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 다시 켜 보는 의미
유명한 게임만 기억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실제로 오락실을 채우고 있던 것은 이런 이름 없는 기판들이었습니다. 명작 사이사이의 빈자리를 메우며 하루하루 동전을 받아 가던 기계들입니다.
이런 게임을 다시 켜 보는 재미는 잘 만들어진 작품을 감상하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무엇을 하려던 게임인지 스스로 알아내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 시절 오락실이 어떤 곳이었는지 떠올리게 되는 부분에 있습니다. 짧게 몇 판 돌려 보는 것만으로도 1996년의 어느 오락실 구석 자리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