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탈리스
크리스탈리스 (Crystalis USA) · 1990 · S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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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 무너진 뒤의 판타지
이 게임은 1997년 10월 1일, 세계가 대재앙으로 무너졌다는 문구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무대는 그로부터 백 년 뒤입니다. 과학이 금지되고 마법이 되살아난 세계에서, 냉동 수면 캡슐에 잠들어 있던 청년이 아무 기억 없이 깨어납니다.
검과 마법이 나오는 판타지처럼 보이지만 실은 폐허가 된 미래를 다루는 이야기이고, 진행하다 보면 곳곳에서 무너진 문명의 흔적이 드러납니다. 8비트 게임이 이런 설정을 이 정도 밀도로 그려냈다는 점이 이 작품을 특별하게 만듭니다.
어떤 게임인가
크리스탈리스(Crystalis)는 SNK가 패미컴으로 내놓은 액션 롤플레잉 게임입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필드를 걸어 다니며, 실시간으로 검을 휘둘러 적과 싸웁니다.
기억을 잃은 주인공은 세계 각지를 돌며 네 명의 현자를 만나고, 네 가지 속성의 검을 모읍니다. 마을에서 정보를 얻고 던전을 공략하며 레벨을 올리는 흐름은 익숙하지만, 전투가 턴제가 아니라 손으로 직접 하는 액션이라는 점이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네 자루의 속성 검
주인공이 손에 넣는 검은 바람, 불, 물, 벼락의 네 가지입니다. 각 검에는 상성이 있어서, 어떤 적은 특정 속성 검이 아니면 아예 상처를 입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투 중에 검을 바꿔 가며 싸우는 것이 기본입니다.
검은 그냥 휘두르기만 하는 게 아닙니다. 버튼을 누른 채 기를 모으면 검이 빛나며 강한 원거리 공격이 나갑니다. 여기에 각 검에 맞는 구슬과 방패를 장착하면 위력과 형태가 달라져서, 같은 검이라도 장비 상태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싸우게 됩니다.
이 차지 공격은 이 게임의 손맛을 결정하는 요소입니다. 적에게 붙어 근접으로 베느냐, 거리를 두고 모아 쏘느냐를 상황마다 고르게 되고, 보스전에서는 이 판단이 승패를 가릅니다.
마법과 성장
검 외에 마법도 씁니다. 회복 마법, 몸을 작게 만들어 좁은 곳을 지나는 마법, 순간이동, 적을 얼리는 마법 등이 있고 대부분 현자들에게 배웁니다. 이 중에는 전투용이 아니라 길을 여는 용도인 것이 많아서, 어떤 마법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갈 수 있는 곳이 달라집니다.
적을 잡으면 경험치가 쌓여 레벨이 오르고, 레벨은 체력과 공격력뿐 아니라 검의 위력에도 직접 영향을 줍니다. 진행이 막혔다고 느껴질 때 잠깐 사냥해서 레벨을 올리면 갑자기 수월해지는 경우가 흔합니다.
SNK가 만든 패미컴 명작
SNK 하면 오락실의 네오지오 기판과 대전격투가 먼저 떠오르지만, 이 회사가 패미컴으로 내놓은 이 작품은 결이 완전히 다릅니다. 액션 RPG라는 장르에서 8비트기 안에 담을 수 있는 것을 거의 끝까지 밀어붙였다는 평을 받습니다.
국내에서는 복사 카트리지로 돌아다니며 알음알음 퍼졌고, 영문 화면이라 대사를 다 이해하지 못한 채 진행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속성 검을 바꿔 가며 싸우는 감각과 폐허가 된 세계의 분위기 덕분에, 해 본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래도록 명작으로 꼽혀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