랙 엠 업
랙 엠 업 (Rack Em Up Program Code L) · 1987 · Konami
게임 화면 하단에서 —키 변경 Controls Settings·저장·불러오기 Save State / Load State
오락실 한구석, 사람이 앉아서 하는 테이블형 기계에 당구가 들어 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슈팅이나 벨트스크롤처럼 화면이 요란하지도 않고, 옆에서 보면 그저 초록색 천 위에 공 몇 개가 놓여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앞에 앉은 사람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습니다. 한 큐가 빗나가면 아깝고, 들어가면 다음 배치가 궁금해서 또 한 판을 하게 되는, 조용하지만 끈질기게 붙잡는 종류의 게임이었습니다.
랙 엠 업(Rack 'Em Up)은 코나미가 1987년에 낸 당구 게임입니다. 일본에서는 더 허슬러라는 제목으로 나왔습니다. 화면을 좌우로 나눠서, 한쪽에는 당구대 전체를 위에서 내려다본 그림을, 다른 쪽에는 큐 뒤에서 공을 바라본 조준 화면을 함께 보여 줍니다. 위에서 본 화면으로 어느 공을 어느 포켓에 넣을지 그림을 그리고, 조준 화면으로 실제 각도와 세기를 맞추는 식입니다.
한 큐를 치는 순서
조작은 단순합니다. 레버로 큐의 방향을 좌우로 돌려 겨냥선을 목표한 공에 맞추고, 버튼으로 세기를 정해 칩니다. 힘 게이지가 왔다 갔다 하는 동안 알맞은 지점에서 버튼을 놓는 방식이라, 세게 치고 싶다고 마음대로 세게 쳐지는 게 아닙니다. 급하게 누르면 게이지가 엉뚱한 데서 멈추고 공이 힘없이 굴러가다 멈춥니다.
당구를 조금이라도 쳐 본 사람이라면 금방 감을 잡습니다. 목적구를 어느 지점에 맞혀야 포켓 쪽으로 굴러가는지, 그 가상의 접점을 머릿속에 그리고 그 지점을 향해 겨냥선을 놓으면 됩니다. 문제는 화면이 도트라서 각도가 아주 촘촘하게 나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한 칸 차이로 겨냥이 흔들리기 때문에, 먼 거리에서 얇게 맞히는 샷은 실제 당구보다 오히려 더 까다롭게 느껴집니다.
수구의 위치를 다음 샷까지 생각하는 습관이 붙으면 점수가 확 올라갑니다. 지금 한 개를 넣는 것보다, 넣고 나서 수구가 어디에 서는지가 훨씬 중요합니다. 이건 실제 당구에서 하는 이야기와 똑같은데, 그 감각을 도트 화면으로 옮겨 놓은 것이 이 게임의 재미입니다.
나인볼과 로테이션
게임 방식은 두 가지를 고를 수 있습니다. 나인볼은 테이블에 남은 공 중에서 가장 번호가 낮은 공을 먼저 맞혀야 하고, 결국 9번을 넣는 쪽이 이기는 방식입니다. 순서가 정해져 있으니 선택의 여지가 적고, 대신 배치가 꼬였을 때 어떻게 빠져나가느냐가 관건이 됩니다.
로테이션은 번호 순서대로 공을 처리하면서 넣은 공의 번호만큼 점수를 쌓는 방식입니다. 높은 번호 공을 넣으면 점수가 크기 때문에, 순서를 지키면서도 큰 공을 노릴 각을 만들어 두는 계산이 들어갑니다. 두 방식 모두 실제 당구장에서 치던 규칙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라, 규칙을 새로 배울 필요가 없다는 점이 진입 문턱을 낮췄습니다.
시간과의 싸움
당구 게임인데도 조급함이 생기는 이유는 제한 시간 때문입니다. 한 샷마다 주어진 시간 안에 쳐야 하고, 판마다 전체 시간도 걸려 있습니다. 실제 당구처럼 팔짱 끼고 한참 배치를 들여다볼 여유가 없습니다. 초반에는 겨냥선을 이리저리 돌려 보다가 시간을 다 써서 엉망으로 치는 일이 자주 생깁니다.
요령은 겨냥선을 움직이기 전에 눈으로 먼저 목표를 정해 두는 것입니다. 위에서 본 화면을 보고 "저 공, 저 포켓" 까지 정한 다음에 레버를 잡으면 시간이 훨씬 넉넉해집니다. 반대로 레버를 돌리면서 생각하기 시작하면 늘 모자랍니다.
앉아서 하는 기계의 자리
이 시기 코나미는 오락실에 놓이는 세로형 슈팅이나 액션 게임 말고도, 다방이나 경양식집 구석에 놓이던 테이블형 기계용 게임을 꾸준히 냈습니다. 화면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자세로 하니 오래 앉아 있어도 덜 지치고, 커피 한 잔 값으로 자리를 차지하는 손님에게 잘 맞는 물건이었습니다. 당구, 마작, 퀴즈 같은 장르가 이런 자리를 채웠습니다.
한국에서도 당구는 오락실 게임의 소재로 익숙한 편이었습니다. 실제 당구장이 워낙 흔했고, 어른들이 하는 것을 보고 자란 아이들에게 당구는 해 보고 싶지만 아직 못 하는 놀이였습니다. 오락실 기계 앞에서는 나이도 키도 상관없이 큐를 잡을 수 있었으니, 그 대리 만족이 적지 않았습니다.
지금 다시 해 보면
요즘 나온 당구 게임들과 견주면 물리 연산은 소박합니다. 회전을 걸어 수구를 되돌리는 세밀한 조작 같은 것은 기대하기 어렵고, 공이 쿠션에 맞고 튀는 각도도 단순한 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규칙이 명확합니다. 각도와 세기만 맞으면 들어가고, 안 맞으면 안 들어갑니다. 변명거리가 없는 대신, 잘 맞았을 때의 기분도 분명합니다.
한 판이 짧고, 실패해도 이유가 바로 보이는 게임입니다. 방금 왜 빗나갔는지 알겠으니 한 번 더 하게 되고, 그렇게 앉아 있다 보면 처음엔 안 보이던 각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화려한 구석은 없어도 이 게임이 오래 사랑받은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