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트 앤 매직 3
마이트 앤 매직 3 (Might and Magic Iii Isles of Terra) · 1993 · Hudson So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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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로 옮겨 온 서양 롤플레잉
PC엔진용 시디롬 게임 목록을 훑다 보면 대부분 일본에서 만든 작품들입니다. 애니메이션 컷신이 들어간 어드벤처, 시디 음원을 앞세운 슈팅, 성우가 대사를 읽어 주는 롤플레잉이 주류였습니다. 그 사이에 미국에서 건너온 본격 던전 탐험 롤플레잉이 하나 끼어 있습니다.
이 게임이 특이한 이유는 원래 개인용 컴퓨터에서 자란 계보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여섯 명짜리 파티를 짜고, 종족과 직업을 고르고, 격자로 나뉜 던전을 한 칸씩 전진하며 지도를 그려 나가는 방식은 콘솔 롤플레잉과 사고방식 자체가 다릅니다. 콘솔에서 이런 게임을 만나는 것 자체가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게임인가
마이트 앤 매직 3(Might and Magic III: Isles of Terra)는 파티를 이끌고 광대한 세계를 탐험하는 롤플레잉 게임입니다. 플레이어는 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모험단을 만들어 마을과 야외, 던전을 오가며 적과 싸우고, 장비와 경험치를 쌓아 강해집니다.
시점은 1인칭입니다. 화면 위쪽에 앞을 바라본 풍경이 나오고 아래쪽에 파티원의 상태가 늘어섭니다. 이동은 격자 단위로 앞뒤좌우와 회전이며, 전투가 시작되면 파티원 각자에게 무엇을 할지 지시합니다. 근접 공격을 할지, 주문을 쓸지, 물러설지를 순서대로 정하는 방식입니다.
파티를 짜는 재미
시작할 때 파티를 직접 구성한다는 점이 이 계열 게임의 핵심입니다. 기사, 성직자, 마법사 같은 직업이 있고 종족도 여러 가지라 어떤 조합으로 시작하느냐가 초반 난이도를 크게 좌우합니다. 앞줄에서 맞아 주는 역할, 회복을 담당하는 역할, 공격 주문을 뿌리는 역할이 갖춰지지 않으면 초반 던전에서부터 고생하게 됩니다.
능력치 하나하나가 실제 전투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어느 쪽에 힘을 실을지 고민하게 됩니다. 이 부분은 콘솔에서 흔한 정해진 주인공을 따라가는 방식과 확연히 다릅니다. 처음에는 무엇이 좋은지 판단할 근거가 없어 막막하지만, 몇 시간 굴려 보면 자기 파티의 약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주문 체계도 방대합니다. 전투용 주문뿐 아니라 이동과 탐색을 도와주는 주문이 많아서, 어떤 주문을 익혀 두었느냐에 따라 갈 수 있는 곳이 달라집니다. 벽 너머를 보거나 함정을 감지하는 주문이 있느냐 없느냐가 던전 공략의 편의를 크게 바꿉니다.
지도를 그리며 나아가기
이 게임의 던전은 친절하지 않습니다. 갈림길이 많고, 같은 모양의 통로가 반복되며, 방향 감각을 잃기 쉽습니다. 원래 이런 게임은 종이에 직접 지도를 그려 가며 하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졌습니다.
지금 처음 잡는 사람에게 권할 만한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방향으로 몇 칸을 갔는지 적어 두지 않으면 같은 자리를 몇 번씩 돌게 됩니다. 특히 순간이동 함정이나 회전 발판이 있는 구간에서는 기록 없이 진행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전투도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합니다. 적의 수준이 지역별로 크게 다르고,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강한 지역에 들어가면 파티가 통째로 전멸합니다. 마을에서 회복하고 장비를 갖춘 뒤 한 걸음씩 범위를 넓혀 나가는 것이 정석입니다. 자주 저장하는 습관도 필수입니다.
시디롬으로 옮기면서 얻은 것
이 판의 장점은 시디라는 매체를 쓴 데서 옵니다. 용량 제한이 느슨해진 덕에 방대한 데이터를 담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음악을 시디 음질로 넣을 수 있었습니다. 던전을 걷는 동안 흐르는 곡이 컴퓨터판의 음원과는 완전히 다른 인상을 줍니다.
다만 시디의 단점도 함께 따라옵니다. 지역을 넘나들 때마다 데이터를 불러오느라 기다리는 시간이 생깁니다. 던전을 들락날락하며 회복하러 마을로 돌아가는 일이 잦은 장르이다 보니, 이 대기 시간이 누적되면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 시리즈는 뉴 월드 컴퓨팅이 개인용 컴퓨터에서 오래 이어 온 계보입니다. 세 번째 작품에 와서 화면 표현과 조작 편의가 크게 개선되었고, 그래서 여러 기종으로 옮겨질 만한 완성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국내에서는
국내에서 PC엔진 시디롬 환경을 갖춘 사람은 극소수였습니다. 본체만으로는 시디 게임을 돌릴 수 없어 별도의 장치가 필요했고, 그 조합을 마련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이 게임은 영어로 된 대사와 메뉴가 빽빽하게 나오는 서양식 롤플레잉입니다. 던전을 헤매며 지도를 그리고 능력치를 계산하는 방식 자체가 그 시절 국내 게이머에게 익숙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 게임을 끝까지 파고든 사람은 정말 드물었지만, 그렇게 파고든 사람들에게는 다른 게임에서 얻기 어려운 종류의 성취감을 남긴 작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