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
몰 (Mole) · 1983 · ASC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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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X 창간호에 실린 게임
MSX 매거진이라는 잡지가 있었습니다. 그 창간호에 소개된 게임 목록 안에 이 작품이 들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게임은 MSX라는 규격이 세상에 처음 알려지던 순간에 함께 진열대에 오른 게임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것도 아무 회사나 만든 것이 아닙니다. MSX 규격 자체를 설계하는 데 관여한 아스키가 직접 만들어 낸 작품입니다. 새 기계를 팔려면 그 기계로 할 수 있는 것을 보여 줘야 하니, 규격을 만든 쪽이 먼저 게임을 내놓은 셈입니다.
어떤 게임인가
몰(Mole)은 두더지를 소재로 한 아스키의 초창기 MSX 액션 게임입니다. 화면 안에서 벌어지는 짧은 판을 반복하는 구성이고, 규칙이 단순해 설명서를 읽지 않아도 몇 번 해 보면 감이 잡히는 종류의 작품입니다.
이 시기 게임들이 대체로 그렇듯 목표는 명확하고 조작은 최소한입니다. 화면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즉각 반응하는 순발력이 실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판이 넘어갈수록 속도가 빨라지며 압박이 커지는 구조입니다.
비슷한 이름의 다른 게임과 헷갈리기 쉽습니다. 몇 년 뒤 다른 회사에서 나온 두더지 굴 파기 퍼즐 계열 작품들과는 별개의 게임이니, 이름만 보고 같은 것으로 묶으면 안 됩니다.
초기 MSX 게임의 생김새
1983년 MSX의 화면은 색이 많지 않고 캐릭터도 큼직한 사각형에 가깝습니다. 배경을 세밀하게 꾸미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 시기 게임들은 대개 화면을 넓게 비워 두고 필요한 것만 배치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소리도 단순합니다. 짧은 효과음과 몇 음짜리 곡이 반복되는데, 이 무미건조함이 오히려 게임의 리듬을 만들어 줍니다. 화면과 소리가 함께 빨라지면 손도 급해지는 식의 원초적인 압박입니다.
이런 구성은 실은 오락실 초기 게임의 문법을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한 화면, 짧은 판, 점점 빨라지는 속도, 그리고 최고 점수. 가정용 기계가 오락실을 흉내 내는 데서 출발했다는 사실이 이런 초기작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조작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절 MSX에는 조이스틱을 꽂는 단자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이용자는 키보드로 게임을 했습니다. 그래서 초기 게임들은 방향키 넷과 스페이스바 하나 정도로 끝나는 조작 체계를 택했고, 이 게임 역시 몇 개 되지 않는 입력만으로 굴러갑니다. 복잡한 것을 넣을 여유가 없었던 시기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덕분에 지금 처음 잡는 사람도 헤맬 일이 없습니다.
아스키라는 회사
아스키는 원래 컴퓨터 잡지와 출판으로 시작한 회사입니다. 그 출판사가 마이크로소프트와 손잡고 여러 제조사가 공통으로 쓸 수 있는 가정용 컴퓨터 규격을 만든 것이 MSX입니다. 하드웨어를 직접 팔지 않으면서 규격을 주도했다는 점이 특이한 위치였습니다.
규격을 만든 쪽의 숙제는 소프트웨어였습니다. 기계는 여러 회사가 만들어 주지만 그 기계로 할 것이 없으면 아무도 사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스키는 자사 게임을 만들고, 동시에 다른 작은 개발사의 게임을 자기 이름으로 유통하며 목록을 채웠습니다.
이 게임은 그 초기 목록의 앞줄에 있던 작품입니다. 뛰어난 명작으로 남지는 않았지만, 새 규격이 자리를 잡으려 애쓰던 시기의 한 조각이라는 점에서 위치가 분명합니다.
국내 MSX와 이 시기 게임들
국내에서 MSX는 대우전자의 아이큐 시리즈와 삼성의 SPC 계열로 보급되었습니다. 학교 앞 문방구나 전자상가에서 카트리지를 사고, 잡지에 실린 프로그램을 직접 쳐 넣어 돌려 보던 것이 그 시절 이용자의 풍경이었습니다.
다만 국내에 들어온 시점은 MSX가 나온 직후가 아니라 몇 년 지난 뒤였습니다. 그래서 국내 이용자에게 익숙한 MSX 게임은 대개 후반기의 화려한 작품들이고, 이 게임처럼 규격 출범 첫해에 나온 작품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게임을 해 보는 것은 명작을 확인하는 일이라기보다, MSX가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눈으로 보는 일에 가깝습니다. 몇 분이면 한 판이 끝나니 부담 없이 열어 볼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