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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바운드

어스바운드 (Earthbound USA) · 1994 · Ninte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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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는 마왕성이 아니라 동네 골목입니다

한밤중 운석이 떨어지는 소리에 잠에서 깬 소년이 잠옷 차림으로 집을 나섭니다. 그가 향하는 곳은 마왕의 성이 아니라 언덕 위 공터이고, 도중에 마주치는 적은 화난 이웃과 미친 개와 히피입니다. 무기는 야구방망이, 회복은 햄버거, 저장은 아빠에게 전화 걸기입니다.

이 게임이 유별난 이유는 단순히 배경이 현대라서가 아닙니다. 광고 문구를 쓰던 카피라이터가 각본을 맡아, 게임이라기보다 어떤 정서를 옮겨 놓은 것 같은 글이 곳곳에 있습니다. 웃기다가 갑자기 서늘해지고, 유치하다가 갑자기 뭉클해지는 그 낙차가 이 게임의 정체입니다.

어스바운드 RPG 게임 화면 1 - 슈퍼 패미컴 (1994)

어떤 게임인가

어스바운드(EarthBound)는 닌텐도가 슈퍼패미컴으로 내놓은 롤플레잉 게임으로, 일본에서는 마더 2라는 이름으로 나왔습니다. 소년 네스가 미래에서 온 벌레 버즈버즈에게 예언을 듣고, 세계를 침식하는 기그를 막기 위해 여덟 곳의 성지를 찾아 떠납니다.

턴제 전투와 파티 편성 같은 뼈대는 정통 RPG를 따르지만, 소재는 전부 현대의 것입니다. 돈은 아빠가 계좌로 부쳐 주고 현금인출기에서 찾으며, 짐이 넘치면 택배 아저씨를 불러 맡깁니다. 피자를 시키면 배달이 오고, 감기에 걸리면 상태 이상으로 표시됩니다.

어스바운드 RPG 게임 화면 2 - 슈퍼 패미컴 (1994)

네 명의 아이들

네스 혼자 가는 여행이 아닙니다. 발명가의 딸이자 초능력을 쓰는 폴라, 기계를 다루는 겁 많은 소년 제프, 그리고 이국의 왕자 푸가 차례로 합류합니다.

각자 역할이 뚜렷합니다. 네스는 공격과 회복을 겸하고, 폴라는 강력한 공격 PSI를 담당하며, 제프는 초능력을 못 쓰는 대신 도구와 총기로 싸우고 고장 난 물건을 고칩니다. 푸는 후반에 합류해 균형을 잡아 줍니다. 특히 제프가 밤에 도구를 뜯어고쳐 새 무기를 만드는 설정은 이 게임 특유의 맛입니다.

동료들이 합류하는 장면도 하나같이 인상적입니다. 순간이동으로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홀로 기차를 타고 몇 나라를 건너오는 식으로 각자 사연을 안고 등장합니다.

굴러가는 계기판과 전투 연출

이 게임의 체력은 숫자가 한 번에 깎이지 않고 자동차 계기판처럼 서서히 굴러 내려갑니다. 그래서 치명타를 맞아도 그 숫자가 0에 닿기 전에 회복하거나 전투를 끝내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이 장치 하나가 전투에 묘한 긴장감을 만듭니다.

또 레벨이 충분히 높으면 약한 적과 마주쳤을 때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자동으로 끝납니다. 잡몹 때문에 시간을 뺏기지 않도록 배려한 설계인데, 지금 기준으로 봐도 세련된 처리입니다.

전투 배경은 정신없이 일렁이는 사이키델릭한 무늬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화면은 어스바운드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되었고, 후속작과 각종 오마주에서 계속 인용되었습니다.

성지 순례와 마지막 싸움

여정의 뼈대는 여덟 곳의 성지를 방문하는 것입니다. 각 성지에 도착하면 네스는 그 땅의 소리를 자신 안에 새기고, 여덟 개가 모두 모였을 때 비로소 마지막 적과 맞설 준비가 됩니다.

최종 전투는 RPG 역사에서 자주 언급되는 장면입니다. 힘으로 이길 수 없는 상대 앞에서 플레이어가 취해야 할 행동이 무엇인지, 그 답이 이 게임 전체가 말해 온 정서와 정확히 맞물립니다. 여기서 게임 곳곳에서 만난 이름들이 어떤 의미였는지도 드러납니다.

국내에서는 정식 발매가 없었지만 슈퍼패미컴 팬들 사이에서는 일찍부터 이름이 알려져 있었고, 지금도 슈퍼패미컴 최고의 RPG를 꼽을 때 빠지지 않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