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리온
질리온 (Zillion Europe v1 2) · 1987 · Se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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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을 쏘는 게 전부가 아닌 잠입 게임
8비트 시절 총 든 주인공이 나오는 게임은 대개 앞으로 달리며 보이는 대로 쏘면 됐습니다. 그런데 이 게임은 켜자마자 적 기지 통로 한복판에 사람을 던져 놓고, 문마다 걸린 잠금장치와 마주치게 만듭니다. 문을 열려면 근처 단말기에서 암호 숫자를 찾아내 조합해야 하고, 그 사이 경비 로봇은 계속 순찰을 돕니다.
총알은 무한이 아니고 체력도 넉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게임을 제대로 하는 방법은 정면 돌파가 아니라, 순찰 경로가 비는 틈을 노려 방을 하나씩 조사하고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1980년대 후반 가정용 8비트기에서 이런 잠입 감각을 맛보게 해 준 작품은 흔치 않았습니다.
어떤 게임인가
질리온(Zillion)은 세가가 마스터시스템으로 내놓은 액션 어드벤처입니다. 같은 이름의 일본 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삼았고, 주인공 JJ는 노자 군단의 지하 기지에 침투해 동료를 구출하고 기지를 폭파하는 임무를 맡습니다.
화면은 옆에서 본 시점이며, 기지는 여러 층의 통로와 방으로 이어진 커다란 미로입니다. 방마다 놓인 단말기를 조사하면 암호의 일부인 숫자와 문자가 나오고, 이걸 모아 잠긴 문을 엽니다. 쏘고 뛰는 액션과 메모하며 푸는 퍼즐이 반반 섞인 구성입니다.
암호를 캐내는 재미
이 게임의 중심은 단말기입니다. 단말기에 접속하면 짧은 코드가 뜨는데, 이걸 그냥 보고 지나가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종이에 적어 두었다가 잠긴 문 앞에서 입력해야 비로소 길이 열립니다. 게임기 앞에 공책과 볼펜을 두고 하던 시절의 정취가 그대로 남아 있는 방식입니다.
단말기 접속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잘못 건드리면 경보가 울리거나 함정이 작동하기도 해서, 아무 단말기나 마구 뒤지면 손해를 봅니다. 어떤 방을 먼저 볼지, 지금 체력으로 어디까지 들어갈지를 계산하는 판단이 계속 요구됩니다.
기지 안에는 열쇠 카드, 회복 아이템, 총의 성능을 올려 주는 부품 같은 것들도 흩어져 있습니다. 다 찾지 않아도 클리어는 가능하지만, 챙겨 두면 후반이 확연히 편해집니다.
동료와 구출
혼자만 움직이는 게임은 아닙니다. 기지 어딘가에 붙잡혀 있는 동료 아펠과 챔프를 구출하면 그들을 조작할 수 있게 됩니다. 캐릭터마다 성능이 조금씩 달라서, 좁은 곳을 지날 때와 정면으로 밀어붙일 때 쓰는 쪽이 달라집니다.
한 캐릭터가 쓰러져도 다른 캐릭터가 남아 있으면 계속 진행할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사실상 목숨을 나눠 가진 셈이라, 위험한 구역을 정찰할 때 누구를 내보낼지 고르는 것도 전략이 됩니다.
애니메이션과 광선총
원작 애니메이션은 실제 완구 광선총과 연동되는 기획으로 만들어졌고, 마스터시스템에도 라이트 팬텀이라는 광선총 주변기기가 있었습니다. 그런 배경 덕분에 이 게임에는 총을 쏘는 감각을 앞세운 연출이 곳곳에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삼성 겜보이 시절 카트리지로 돌아다녔고, 애니메이션을 모르는 사람도 기지를 헤매는 이 독특한 진행 때문에 기억에 남겨 두었습니다. 지도가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재미가 붙는, 인내심을 요구하는 대신 오래 남는 게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