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퍼 팩맨
하이퍼 팩맨 (Hyper Pacman) · 1995 · Sem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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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국내 오락실에 팩맨이 하나 더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팩맨은 평면이 아니라 비스듬히 기울어진 입체 화면 위를 돌아다녔고, 무엇보다 점프를 했습니다. 유령에게 쫓기다 막다른 골목에 몰려도 뛰어넘어 버리면 그만이었습니다. 원조 팩맨을 알던 사람에게는 반칙처럼 보이는 기능이었고, 바로 그 점 때문에 붙잡고 하게 되는 게임이었습니다.
하이퍼 팩맨(Hyper Pacman)은 세미콤이 1995년 9월에 내놓은 미로 게임입니다. 나중에 하이퍼 맨이라는 이름으로도 돌았습니다. 남코의 팩맨 계보를 정식 허가 없이 가져다 만든 게임이고,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남코가 1987년에 낸 팩매니아의 구성을 따라간 작품입니다. 미로 전체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시점, 점프로 유령을 넘어가는 조작이 그 팩매니아에서 온 것입니다.
점프가 바꾼 미로 게임
원래 팩맨의 긴장감은 도망갈 길이 정해져 있다는 데서 나옵니다. 미로의 통로는 정해진 폭이 있고, 유령이 양쪽에서 오면 끝입니다. 파워 쿠키를 먹어 반격할 수 있는 잠깐을 빼면 계속 쫓기는 게임입니다.
점프가 들어가면 그 전제가 흔들립니다. 정면에서 유령이 와도 뛰어서 넘으면 지나갑니다. 그렇다고 게임이 쉬워지지는 않습니다. 대신 미로가 더 복잡해지고 유령이 더 많아지고 더 빨라집니다. 결국 점프를 잘 쓰는 것이 실력이 되고, 언제 뛰고 언제 돌아가느냐를 판단하는 게임이 됩니다.
초보자가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점프를 남발하는 것입니다. 뛰는 동안에는 방향을 크게 바꾸기 어렵고 착지 지점이 정해져 버립니다. 유령 하나를 넘었는데 그 뒤에 다른 유령이 기다리고 있으면 그대로 물립니다. 넘을 유령 하나만 보지 말고 착지할 자리에 무엇이 있는지 먼저 보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요령 몇 가지
미로 게임의 기본은 경로를 외우는 것입니다. 화면을 보고 즉석에서 판단하려 하면 유령이 빨라지는 후반에 반드시 막힙니다. 한 스테이지를 여러 번 반복하며 어느 쪽부터 도는 것이 효율적인지 몸에 익히는 편이 빠릅니다.
파워 아이템은 아껴 두는 것이 좋습니다. 남은 점이 흩어져 있고 유령이 여러 방향에서 조여 올 때, 그때 먹고 한꺼번에 정리하면 스테이지 하나를 통째로 넘길 수 있습니다. 스테이지 시작하자마자 먹어 버리면 정작 위험한 후반에 쓸 것이 없습니다.
모퉁이 처리도 중요합니다. 유령은 대체로 플레이어를 향해 오기 때문에, 모퉁이를 돌면 잠깐 시야가 끊기며 거리가 벌어집니다. 직선 통로에서 정면으로 마주 보고 달리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이 오래 사는 요령입니다. 2인 플레이가 되므로 둘이 서로 다른 구역을 맡아 도는 방식도 유효합니다.
스노우 브라더스 기판을 개조하다
이 게임에는 국내 오락실 기판 역사와 얽힌 재미있는 사정이 있습니다. 게임이 돌아가는 하드웨어가 토아플랜의 스노우 브라더스 기판을 손본 것입니다. 1990년에 나온 그 기판을 그대로 쓴 것이 아니라, 68000 CPU를 16MHz로 올리고 사운드용 Z80은 오히려 4MHz로 낮춰 놓았습니다. 사운드 칩으로는 야마하 YM2151과 OKI MSM6295를 썼습니다.
공교롭게도 YM2151은 남코의 정품 팩매니아가 쓰던 것과 같은 칩입니다. 원본의 소리에 가깝게 맞추려는 선택이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결과적으로 비슷한 음색이 나옵니다. 이미 널리 퍼져 있어 구하기 쉬운 기판을 개조해 개발 비용과 기간을 줄이는 방식은 그 시절 국내 개발사들이 흔히 쓰던 접근이었습니다.
세미콤이라는 회사
세미콤은 1994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제일컴퓨터의 오락실 게임 개발팀이 전재윤을 중심으로 떨어져 나와 세운 회사입니다. 초기작들은 미진컴퓨터를 통해 유통되었습니다.
이 회사의 목록을 보면 성격이 뚜렷합니다. 쿠키 앤 비비는 퍼즐 보블 계열이고, 롤링 크러시는 퍼즐루프 계열입니다. 잘 팔린 게임의 구성을 가져와 자기들 식으로 다시 만드는 방식이 주력이었고, 이 게임도 그 흐름 위에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해치 캐치나 초키 초키처럼 자기 색이 있는 작품도 함께 냈습니다.
세미콤은 2001년까지 오락실 게임을 여러 편 만들다가 이후 사업을 성인용 기기 쪽으로 완전히 옮깁니다. 1990년대 후반 국내 오락실 기판 시장이 어떻게 굴러갔고 어떻게 끝났는지를, 이 회사 하나의 이력이 압축해서 보여 줍니다.
그 시절 오락실에서
동네 오락실이나 문방구 앞 기계에서 이 게임을 만난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팩맨이라는 이름이 이미 익숙했고, 화면이 입체로 보이고 점프가 된다는 점이 새로 보였습니다. 정품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지금 브라우저에서 해 보면 팩매니아를 얼마나 가까이 따라갔는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와 동시에 1990년대 중반 국내 개발사가 남의 기판을 손봐 가며 어떤 게임을 만들어 냈는지도 함께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