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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의 봉인

하자의 봉인 (Haja no Fuin) · 1987 · Ko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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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임에는 커다란 종이 지도가 딸려 왔습니다. 상자를 열면 격자가 그려진 큰 지도가 접혀 있고, 게임을 하려면 그걸 펼쳐 놓고 옆에 두어야 했습니다. 화면이 보여 주는 건 내 주변 네 칸 남짓뿐이라, 그 종이가 없으면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 지도는 복사 방지 장치이기도 했습니다. 소프트만 베껴서는 게임을 진행할 수 없게 만든 겁니다.

하자의 봉인(Haja no Fuin)은 코가도가 만든 턴제 롤플레잉 게임입니다. 세 대륙에 걸친 다섯 나라를 돌아다니며 동료를 모으고 장비를 갖추고, 마지막에 어둠의 군주를 봉인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1986년 PC-8801로 처음 나온 뒤 여러 기종으로 옮겨졌고 MSX판은 이듬해에 나왔습니다.

하자의 봉인 액션 게임 화면 1 - MSX (1987)

구멍으로 세상을 보는 게임

화면 구성이 독특합니다. 오른쪽 위 한 구석에 작은 창이 있고 거기에 지도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창이 정말 작아서, 사방으로 네 칸 정도만 보입니다. 나머지 화면은 가만히 서 있는 일행의 모습을 보여 주는 데 쓰입니다.

이 좁은 시야가 이 게임의 성격을 결정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종이 지도를 짚어 가며 방향을 잡아야 하고, 좌표를 세어 가며 이동해야 합니다. 요즘 게임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답답하기 짝이 없지만, 이 시절 일본 컴퓨터 RPG는 이런 불친절함 자체가 게임의 일부였습니다. 세계가 넓다는 걸 화면 크기가 아니라 헤매는 시간으로 느끼게 하는 방식입니다.

지형은 나라마다 다릅니다. 어떤 곳은 바다로 막혀 있고 어떤 곳은 산이 길을 끊습니다. 넘어갈 수단을 손에 넣기 전까지는 갈 수 없는 곳이 있어서, 어디가 지금 갈 수 있는 곳인지 파악하는 것 자체가 초반의 과제입니다.

하자의 봉인 액션 게임 화면 2 - MSX (1987)

한 명씩 상대하는 1인칭 전투

전투는 완전한 1인칭입니다. 적이 화면 가득 나타나고, 메뉴에서 명령을 골라 싸웁니다. 특이한 건 한 번에 한 마리씩만 상대한다는 점입니다. 여럿이 몰려나와 난전을 벌이는 게 아니라 일대일 대결이 이어지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턴마다 싸울 사람을 바꿀 수 있습니다. 앞에 나선 동료가 위험해지면 다음 턴에 다른 동료로 교대하는 식입니다. 이 교대가 사실상 이 게임의 전투 시스템 전부라고 해도 될 만큼 중요합니다. 체력이 깎인 동료를 계속 세워 두다가 잃는 게 가장 흔한 실패 방식입니다.

일행은 주인공을 포함해 최대 넷입니다. 검을 쓰는 전사, 여전사, 도끼를 든 사내가 차례로 합류합니다. 혼자 다닐 때와 넷이 다닐 때의 안정감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초반에는 동료를 찾는 것이 최우선 과제입니다.

돈을 모으고 장비를 갖추는 리듬

화폐 단위는 길더입니다. 몬스터를 잡으면 돈이 들어오고 그 돈으로 마을에서 무기와 방어구를 삽니다. 이 시기 RPG가 대개 그렇듯, 새 지역으로 넘어가기 전에 충분히 사냥해서 장비를 한 단계 올려 두는 준비 과정이 필요합니다.

처음 하는 사람이 가장 많이 겪는 좌절이 준비 없이 진행하는 것입니다. 이 게임은 지금 가는 곳이 나에게 맞는 난이도인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몇 걸음 걸었는데 적이 갑자기 세졌다면 그건 아직 갈 때가 아니라는 신호입니다. 되돌아가서 돈을 모으는 게 정답입니다.

세이브와 회복 지점의 위치를 외워 두는 것도 중요합니다. 멀리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전멸하면 그동안의 진행이 통째로 날아갑니다.

바다를 건넌 일본 RPG

이 게임에는 게임사적으로 의미 있는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듬해 세가 마스터 시스템으로 옮겨져 미러클 워리어스라는 제목으로 북미와 유럽에 나갔는데, 이것이 정식으로 영어화되어 서구에 나온 초기 일본 RPG 중 하나로 꼽힙니다. 드래곤 퀘스트와 파이널 판타지가 서구에 알려지기 전의 일입니다.

패미컴판도 있고 FM-7, X1 같은 일본 컴퓨터로도 나왔습니다. 하나의 게임이 이렇게 여러 기종으로 퍼진 건 그만큼 당시 일본에서 평가가 괜찮았다는 뜻입니다.

한국에서는 MSX가 집에 있던 기계였고, 일본어로 된 RPG는 진입 장벽이 높았습니다. 글을 읽어야 진행되는 장르라 어린 사용자들에게는 특히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 게임을 실제로 끝까지 해 본 사람은 국내에 많지 않습니다. 대신 종이 지도를 펼쳐 놓고 좌표를 세어 가며 대륙을 걷는 그 방식만은, 지금 다시 해 봐도 묘한 몰입감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