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 로어
나이트 로어 (Knight Lore) · 1986 · Jale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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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비트 화면에 3차원 공간을 그려 낸 게임
1984년에 나온 이 게임을 처음 본 사람들은 화면을 믿지 못했습니다. 8비트 기계가 그리던 그림은 대개 옆에서 본 평면이거나 위에서 내려다본 격자였는데, 이 게임은 비스듬히 기울어진 방 안을 입체로 보여 주었습니다. 방 가운데 놓인 상자 뒤로 캐릭터가 돌아 들어가면 몸이 상자에 가려지고, 상자 위로 뛰어오르면 그 위에 올라선 것이 그대로 보입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기술을 만든 사람들은 필메이션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겹쳐 그리는 순서를 계산해서, 앞뒤 관계가 화면에 제대로 나타나도록 한 방식입니다. 지금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화면 위 물체들이 서로를 가리지 못하고 뭉개지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이 게임이 그 뒤로 쏟아진 수많은 비스듬한 시점 게임들의 출발점이 된 이유입니다.
어떤 게임인가
나이트 로어(Knight Lore)는 비스듬한 시점의 액션 어드벤처입니다. 늑대인간의 저주에 걸린 주인공이 저주를 풀 약을 만들기 위해, 성 안 곳곳에 흩어진 재료를 찾아 마법사의 솥에 가져다 넣는 것이 목표입니다. 성은 여러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고, 방과 방은 문으로 이어집니다. 한 방에는 한 화면이 배정되어, 문을 지날 때마다 화면이 통째로 바뀝니다.
핵심은 낮과 밤입니다. 화면 아래의 표시가 낮과 밤을 오가고, 밤이 되면 주인공이 늑대인간으로 변합니다. 사람일 때와 늑대일 때 움직임과 뛰는 높이가 다르고, 어떤 방은 특정한 모습일 때만 통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변신을 기다리거나, 변신하기 전에 서둘러 건너가는 판단이 게임 내내 따라붙습니다.
방 하나가 곧 퍼즐
이 게임의 방은 대체로 발판과 장애물의 배치 하나하나가 문제로 되어 있습니다. 어디에서 뛰어 어디를 밟고 어느 쪽 문으로 나갈 것인지가 정해져 있고, 그것을 알아내는 것이 곧 진행입니다. 움직이는 발판,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기둥, 닿으면 안 되는 가시 같은 것들이 방마다 다르게 놓여 있습니다.
여기에 비스듬한 시점 특유의 어려움이 겹칩니다. 화면에서는 발판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깊이가 어긋나 허공을 밟는 일이 자주 생깁니다. 이 감각을 잡는 것이 이 게임을 익히는 첫 관문입니다. 요령은 캐릭터의 그림자와 발밑을 기준으로 보는 것이고, 확신이 서지 않으면 한 칸씩 조금 움직여 위치를 확인한 뒤 뛰는 것입니다.
처음 하는 사람이 겪는 일
이 게임은 친절하지 않습니다. 어디로 가라는 안내가 없고, 방을 잘못 들어가면 그대로 죽는 구조도 흔합니다. 목숨도 넉넉하지 않아서, 몇 방 헤매다 보면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이 게임을 하던 사람들은 대개 종이에 지도를 그렸습니다. 어느 방에서 어느 문으로 나가면 어디가 나오는지, 어떤 방이 낮에만 지나갈 수 있는지를 하나씩 적어 두는 식입니다.
두 번째로 겪는 것은 재료를 옮기는 일의 번거로움입니다. 물건을 들고 가는 동안에는 움직임에 제약이 생기므로, 빈손이면 넘을 수 있던 자리를 못 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래서 물건을 잠시 내려놓고 길을 만든 뒤 다시 가지러 오는 식의 절차가 필요해집니다.
시리즈 안에서의 자리
이 게임은 사브레맨을 주인공으로 한 연작 가운데 세 번째 작품입니다. 앞선 두 편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평면 화면이었고, 이 편에서 비스듬한 시점으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같은 인물이 나오지만 게임의 생김새가 통째로 달라진 셈입니다. 이 시점과 기술은 같은 제작사의 뒤이은 작품들로 이어졌고, 다른 회사들도 곧 비슷한 방식을 따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게임이 나온 뒤 몇 년 동안 유럽 8비트 기계에는 비슷한 시점의 게임이 쏟아졌습니다. 하나의 게임이 장르 하나를 만들어 낸 흔치 않은 사례입니다.
이식판과 국내 사정
원래 영국의 8비트 컴퓨터용으로 나온 게임이지만, 여러 기계로 옮겨졌습니다. 기계마다 화면 색과 속도가 조금씩 달라서, 어느 판으로 해 보았느냐에 따라 기억이 다릅니다. 방의 구조와 규칙은 대체로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국내에서는 오락실보다는 가정용 8비트 컴퓨터를 갖춘 소수의 사람들이 접한 게임입니다. 그 시절 국내 컴퓨터 문화에서 이런 유럽산 게임은 잡지 소개나 복사한 매체를 통해 조금씩 퍼졌고, 화면을 처음 본 사람들은 대개 "이게 어떻게 이 기계에서 돌아가느냐"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지금 다시 해 보면 조작은 뻑뻑하고 난이도는 사납지만, 방 하나를 풀어 다음으로 넘어갈 때의 성취감은 그대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