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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빌즈 크러시

데빌즈 크러시 (Devil S Crush Naxat Pinball USA) · 1990 · Naxat So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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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각별과 해골로 뒤덮인 핀볼 대

핀볼 게임이라기에는 첫 화면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대 한가운데에 커다란 오각별이 박혀 있고, 범퍼가 있어야 할 자리마다 해골이 이를 드러내고 웃습니다. 위쪽에는 여자의 얼굴이 석상처럼 붙어 있는데, 공을 몇 번 맞히면 그 얼굴이 뱀의 머리로 바뀌고, 더 두들기면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합니다. 나무와 쇠로 만든 진짜 핀볼 대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그림을, 화면 안에서만 가능한 방식으로 끝까지 밀어붙인 게임입니다.

덕분에 이 게임은 공이 굴러가는 물리 감각보다 대 자체를 파헤치는 재미로 기억됩니다. 어디를 때리면 무엇이 열리는지, 어느 통로로 공을 밀어 넣어야 다른 방으로 넘어가는지를 하나씩 알아 가는 과정이 그대로 공략이 됩니다. 한 판이 길어질수록 화면은 점점 요란해지고, 처음에는 보이지도 않던 길이 계속 나옵니다.

데빌즈 크러시 액션 게임 화면 1 - PC엔진 (1990)

어떤 게임인가

데빌즈 크러시(Devil's Crush)는 화면 안에 만들어진 핀볼 대 하나를 끝까지 파고드는 게임입니다. 조작은 단순합니다. 좌우 버튼이 각각 왼쪽과 오른쪽 플리퍼를 올리고, 처음 공을 쏘아 올리는 것과 대를 살짝 흔드는 것 정도가 전부입니다. 목표는 공을 아래로 흘려보내지 않으면서 점수를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보통의 핀볼과 다른 점은 대 위에 놓인 것들이 전부 살아 있다는 데 있습니다. 해골이 굴러다니고, 두들기면 형태가 바뀌는 표적이 있으며, 조건을 채우면 화면이 통째로 다른 공간으로 전환됩니다. 점수를 벌기 위해 공을 살려 두는 게 아니라, 다음 장면을 보고 싶어서 공을 살려 두게 되는 구조입니다.

데빌즈 크러시 액션 게임 화면 2 - PC엔진 (1990)

위아래로 길게 이어진 필드

필드는 화면 하나에 다 들어가지 않습니다. 공의 위치를 따라 화면이 위아래로 따라 움직이고, 아래쪽에는 플리퍼와 공을 잃는 구멍이, 가운데와 위쪽에는 점수를 벌어들이는 장치가 몰려 있습니다. 공을 위로 올려 보내 두면 한동안 안전하게 점수가 쌓이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긴장이 올라갑니다.

그래서 이 게임의 기본 운영은 공을 되도록 위쪽에 오래 머무르게 하는 것입니다. 아래에서 급하게 쳐 올리기보다, 플리퍼 위에 공을 한 번 세워 두고 각도를 본 다음 정확히 위쪽 통로로 밀어 넣는 편이 훨씬 안정적입니다. 초보와 익숙한 사람의 점수가 몇십 배씩 벌어지는 이유도 대부분 여기에 있습니다.

숨은 방으로 들어가는 길

이 게임의 진짜 알맹이는 본 필드가 아니라 그 안에 숨어 있는 별도의 방들입니다. 정해진 표적을 모두 부수거나 특정 통로로 공을 통과시키면 화면이 바뀌면서, 괴물이 기다리는 다른 공간으로 들어갑니다. 여기서는 제한 시간 안에 상대를 공으로 두들겨 부수면 큰 점수가 들어오고, 실패해도 원래 대로 돌아올 뿐이라 손해는 크지 않습니다.

처음 하는 사람이 가장 많이 놓치는 부분이 이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하면 해골 몇 개 두들기다 공을 잃는 평범한 핀볼로 끝나지만, 방으로 들어가는 조건을 알고 나면 같은 한 판이 아예 다른 게임이 됩니다. 그래서 처음 몇 판은 점수를 포기하고 길 찾기에만 쓰는 편이 낫습니다.

점수가 끝없이 불어나는 게임

핀볼인데도 점수 자릿수가 비정상적으로 큽니다. 배수가 붙고, 보너스 구간을 반복해서 드나들면 숫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때문에, 익숙한 사람의 기록은 초보의 기록과 단위 자체가 다릅니다. 공 하나를 오래 살려 두면 한 판이 삼십 분, 한 시간을 넘기는 일도 드물지 않습니다.

이런 구조 덕분에 이 게임은 깬다는 개념보다 기록을 늘린다는 개념으로 즐기게 됩니다. 어제보다 자릿수가 하나 더 늘어난 숫자를 보려고 다시 붙게 되는, 점수형 게임 특유의 중독성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시리즈 안에서의 자리

앞서 나온 에일리언 크러시가 외계 생물을 소재로 이런 화면 핀볼의 틀을 처음 잡았다면, 이 게임은 그 문법을 악마와 오컬트 쪽으로 옮겨 놓고 필드를 훨씬 크게 키운 후속작입니다. 변형하는 표적, 숨은 방, 눈덩이처럼 커지는 배수 점수 같은 요소가 여기서 자리를 잡았고, 뒤에 나온 같은 계열 작품들도 대체로 이 틀을 따랐습니다.

국내에서는 이 기종 자체가 흔치 않아 오락실보다 잡지 지면이나 아는 사람 집에서 처음 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도 한 번 화면을 본 사람은 좀처럼 잊지 못합니다. 핀볼이라는 소재로 이렇게까지 기괴하고 화려한 그림을 뽑아낸 게임이 흔치 않았고, 내내 깔리는 음악도 이 게임을 기억하게 만드는 큰 몫을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