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밍즈 (마스터시스템)
레밍즈 (Lemmings Europe) · 1992 · Se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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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라고 걸어가는 초록 머리들
이 게임의 주인공들은 도무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습니다. 문에서 쏟아져 나온 순간부터 앞만 보고 걷고, 벽을 만나면 돌아서고, 낭떠러지가 있으면 그대로 떨어집니다. 용암이 있어도 걸어 들어가고, 함정이 돌아가고 있어도 멈추지 않습니다. 플레이어는 이 무모한 행렬을 지켜보며 누구를 무엇으로 만들지 결정하는 관리자 역할을 맡습니다.
그래서 이 게임의 긴장은 반사신경이 아니라 판단에서 옵니다. 지금 저 선두를 멈춰 세울 것인가, 아니면 몇 마리를 희생하고 시간을 벌 것인가. 스무 마리 중 열다섯 마리만 살리면 되는 스테이지에서, 남은 다섯 마리를 어디에 쓸지 계산하는 순간의 감각이 이 게임의 정체입니다.
어떤 게임인가
레밍즈(Lemmings)는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작은 생물들을 입구에서 출구까지 무사히 보내는 퍼즐 게임입니다. 각 스테이지에는 나오는 레밍 수, 구해야 할 최소 수, 제한 시간, 그리고 쓸 수 있는 능력의 종류와 개수가 정해져 있습니다.
플레이어는 개별 레밍을 직접 조종하지 못합니다. 대신 걸어가는 레밍 하나를 골라 역할을 부여합니다. 굴을 파는 역할, 벽을 뚫는 역할, 계단을 놓는 역할, 낙하산을 펴는 역할,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뒤따르는 무리를 돌려세우는 역할 등이 있습니다. 이 역할들을 어디서 누구에게 주느냐가 스테이지의 답입니다.
역할을 배분하는 법
가장 먼저 익혀야 할 것은 멈춰 세우는 역할입니다. 한 마리를 통로 한가운데 세워 두면 뒤따라오던 무리 전체가 그 앞에서 되돌아갑니다. 위험한 구간을 만들거나 작업이 끝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할 때, 이 한 마리가 나머지 전부를 살립니다. 다만 세워 둔 레밍은 대개 그 자리에 남게 되므로, 구해야 할 수를 계산할 때 미리 빼 두어야 합니다.
다음은 파는 방향의 구분입니다. 아래로 파는 것, 옆으로 뚫는 것, 비스듬히 파 내려가는 것이 각각 다르고, 잘못 고르면 지형이 엉망이 되어 되돌릴 수 없습니다. 특히 아래로 파는 역할은 한 번 시작하면 바닥을 뚫고 아래층까지 내려가는 일이 많아,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고 써야 합니다.
계단을 놓는 역할은 개수가 정해져 있어 도중에 재료가 떨어지면 허공에서 멈춥니다. 그럴 때 뒤이어 오는 다른 레밍에게 다시 계단 역할을 주어 이어 붙이는 것이 기본 기술입니다.
시간과 속도 조절
제한 시간이 있기 때문에 무작정 신중할 수도 없습니다. 화면에는 레밍이 문에서 나오는 간격을 조절하는 기능이 있어서, 서둘러야 할 때는 간격을 좁혀 한꺼번에 내보내고 조심해야 할 구간에서는 넓혀 한 마리씩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이 조절을 잘 쓰는 것만으로도 통과율이 크게 달라집니다.
정말 급할 때는 전원을 폭파하는 최후의 수단도 있습니다. 실패를 인정하고 빠르게 다시 시작하는 것도 이 게임에서는 하나의 전략입니다.
8비트로 옮겨진 무리
마스터시스템판은 화면에 동시에 표시되는 레밍 수와 스테이지 크기가 원판보다 조정되었지만, 역할을 나눠 주고 길을 만드는 핵심 규칙은 손대지 않았습니다. 작은 화면 안에서 픽셀 몇 개짜리 레밍들이 줄지어 걸어가는 모습은 지금 봐도 묘하게 사랑스럽습니다.
한 스테이지를 풀고 나면 다음 화면이 곧바로 더 고약한 지형을 들이밉니다. 답이 보이지 않던 스테이지를 며칠 뒤에 다시 켰다가 단번에 풀어 버리는 경험이, 이 게임을 오래 붙잡게 만드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