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 오브 레가이아
레전드 오브 레가이아 (Legend of Legaia) · 1998 · S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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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투 게임처럼 커맨드를 넣는 RPG
턴제 RPG의 전투는 대개 목록에서 명령을 고르는 것으로 끝납니다. 공격, 마법, 아이템. 그런데 이 게임은 그 자리에 방향 입력을 집어넣었습니다. 공격을 고른 뒤 위, 아래, 좌, 우 버튼을 순서대로 눌러 어느 부위를 어떻게 때릴지 직접 정하는 것입니다.
위는 상단, 아래는 하단, 좌우는 각각 왼팔과 오른팔로 대응됩니다. 캐릭터마다 한 턴에 쓸 수 있는 입력 횟수가 정해져 있고, 그 안에서 순서를 조합합니다. 그리고 특정 순서로 입력하면 정해진 필살기가 발동합니다. 즉 이 게임의 필살기는 배우는 게 아니라 찾아내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넣어 보다가 처음 보는 기술이 터지는 순간의 놀라움이 이 게임의 첫인상을 결정합니다.
어떤 게임인가
레전드 오브 레가이아(Legend of Legaia)는 안개에 뒤덮인 세계를 여행하며 이야기를 진행하는 3D RPG입니다. 세계는 정체불명의 안개에 잠겨 사람들이 괴물로 변해 버렸고, 주인공 일행은 그 원인을 좇아 대륙을 가로지릅니다.
전투는 무작위로 발생하는 턴제이고, 앞서 말한 방향 입력 조합이 핵심입니다. 마을에서 정보를 모으고 던전을 돌파하며 나아가는 큰 흐름은 다른 RPG와 같지만, 전투에 들어가는 순간 성격이 확연히 달라집니다.
세리와 함께 싸운다
주인공 일행에게는 각각 세리라는 존재가 붙어 있습니다. 몸에 깃들어 힘을 빌려주는 정령 같은 개념인데, 이것이 이 게임의 두 번째 축입니다. 전투 중 세리를 부르면 캐릭터의 겉모습이 바뀌면서 공격력이 크게 오르고, 그 상태에서만 쓸 수 있는 기술이 열립니다.
세리는 적을 쓰러뜨리며 조금씩 성장합니다. 그리고 필드에서 만나는 다른 세리를 흡수해 새로운 능력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마법에 해당하는 것이 대부분 세리를 통해 나오므로, 어떤 세리를 모으고 어느 캐릭터에게 붙였는지가 파티 성격을 결정합니다.
필살기를 찾아내는 과정
이 게임에서 가장 오래 붙잡히는 부분이 기술 발굴입니다. 캐릭터마다 정해진 입력 순서가 있고, 그걸 우연히 맞히면 그때부터 목록에 기록되어 언제든 다시 쓸 수 있게 됩니다. 처음에는 두 번 입력짜리 짧은 기술만 나오지만, 성장해서 한 턴에 넣을 수 있는 입력 수가 늘어나면 훨씬 긴 조합이 가능해집니다.
요령은 규칙성을 의심해 보는 것입니다. 같은 방향을 반복하거나, 대칭되는 순서로 넣거나, 상단과 하단을 번갈아 넣는 식의 조합이 잘 걸립니다. 그리고 이미 아는 짧은 기술의 입력 앞뒤에 한 번을 더 붙여 보면 상위 기술이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잡몹과 싸울 때 이것저것 실험해 두고, 강한 적 앞에서는 확실히 아는 기술만 쓰는 식으로 나누면 안전합니다.
난이도가 튀는 지점
이 게임은 초반이 꽤 험합니다. 한 턴에 넣을 수 있는 입력이 적어 화력이 부족하고, 회복 수단도 넉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회복 아이템을 넉넉히 사 두는 것이 거의 필수입니다.
또 적 중에는 특정 부위를 막고 있는 종류가 있습니다. 상단을 막고 있으면 위쪽 입력이 전부 튕겨 나가므로, 하단이나 측면 위주로 조합을 바꿔야 합니다. 이걸 모르고 같은 조합만 반복하면 아무리 때려도 데미지가 안 들어갑니다. 적의 자세를 보고 어느 방향이 열려 있는지 판단하는 것이 중반 이후의 핵심입니다.
같은 시기 RPG들 사이에서
플레이스테이션 후반기에는 3D RPG가 쏟아졌고, 대부분 화려한 연출과 이야기로 승부했습니다. 이 게임은 그 흐름 속에서 전투 방식 하나로 자리를 잡은 경우입니다. 이야기는 비교적 정직한 모험담이고 연출도 절제된 편이지만, 매 전투마다 손가락을 움직여야 한다는 점이 다른 RPG와 확실히 구분됩니다.
그래서 턴제 RPG의 전투가 지루하게 느껴지는 사람에게 특히 권할 만합니다. 명령을 고르고 결과를 지켜보는 게 아니라, 계속 무언가를 입력하고 있어야 하니까요. 반대로 편하게 진행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손이 바쁜 게임일 수 있습니다. 다만 몇 시간만 지나면 조합이 손에 익어, 나중에는 생각하기 전에 손가락이 먼저 움직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