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콤 vs SNK (플레이스테이션)
캡콤 vs SNK 밀레니엄 파이트 2000 (Capcom vs SNK Millennium Fight 2000) · 2000 · Ca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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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회사가 손을 잡던 날
90년대 내내 오락실에서 캡콤과 SNK는 서로 넘볼 수 없는 두 산맥이었습니다. 한쪽에는 스트리트 파이터가, 다른 쪽에는 킹 오브 파이터즈가 있었고, 어느 쪽이 더 센가 하는 논쟁은 동네 오락실마다 결론 없이 돌고 돌았습니다. 그 논쟁을 게임 회사가 직접 끝내 보겠다고 나선 것이 이 작품입니다. 류와 쿄가 같은 화면에 서 있는 첫 스크린샷이 잡지에 실렸을 때의 술렁임은 지금 돌아봐도 유별났습니다.
캡콤 vs SNK(Capcom vs SNK Millennium Fight 2000)는 캡콤이 개발하고 SNK가 캐릭터를 내준 대전격투 게임입니다. 스트리트 파이터 계열과 아랑전설·킹 오브 파이터즈 계열의 인물들을 한 판에 올려놓고, 캡콤 쪽 그래픽과 조작 감각으로 굴러가게 만들었습니다. 플레이스테이션판은 오락실 기판의 이식으로, 집에서 두 진영을 붙여 보고 싶던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표준 답안이었습니다.
레이시오라는 이상한 저울
이 게임의 성격을 결정한 건 레이시오 시스템입니다. 캐릭터마다 1에서 4까지 등급이 매겨져 있고, 팀 전체 합계가 4를 넘지 않게 짜야 합니다. 레이시오 1짜리 넷을 데려와 넉넉하게 갈 수도 있고, 레이시오 4인 강자 하나로 전부 밀어붙일 수도 있습니다. 등급이 높을수록 체력과 공격력이 통째로 올라가기 때문에, 레이시오 4 캐릭터 하나가 상대 셋을 연달아 눕히는 광경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팀 구성 자체가 하나의 도박이 됩니다. 자신 있는 캐릭터가 하나뿐이면 몰빵이 낫고, 상성으로 돌려막고 싶으면 잘게 쪼개는 편이 낫습니다. 대전을 시작하기 전 선택 화면에서 이미 승부의 절반이 갈리는 구조라, 옆 사람 고르는 걸 흘끔거리는 눈치 싸움이 함께 붙었습니다.
그루브, 두 회사의 조작을 고르다
또 하나의 축은 그루브입니다. 캡콤 그루브를 고르면 스트리트 파이터 계열처럼 게이지를 여러 단으로 쌓아 두었다가 필요한 만큼 꺼내 쓰고, SNK 그루브를 고르면 킹 오브 파이터즈 계열처럼 직접 기를 모으고 체력이 깎이면 초필살기를 쓸 수 있게 됩니다. 같은 캐릭터라도 어느 그루브에 얹느냐에 따라 운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 선택은 취향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캡콤 게임으로 자란 사람은 자연히 캡콤 그루브를 잡았고, SNK 손맛에 익숙한 사람은 기 모으기 버튼부터 찾았습니다. 한 게임 안에서 두 회사의 조작 문법을 나란히 비교해 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시리즈의 가장 큰 재미였습니다.
낯익은 얼굴들
캡콤 쪽에서는 류와 켄, 춘리, 장기에프, 사가트, 발로그, 베가 같은 스트리트 파이터의 간판들이 나옵니다. 모리건처럼 뱀파이어 계열의 얼굴도 섞여 있어, 스트리트 파이터만 알던 사람에게는 반가운 손님이었습니다. SNK 쪽은 쿄와 이오리, 테리와 앤디, 마이, 료와 유리, 기스와 루갈 같은 이름들이 자리를 채웁니다.
숨겨진 캐릭터를 열어 가는 재미도 상당했습니다. 조건을 채우면 강화판 보스나 다른 판본의 인물이 풀리는 식이라, 혼자서도 계속 붙잡고 있을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후 캡콤 vs SNK 2로 그루브가 여섯 개까지 늘어나며 시리즈는 한층 커지지만, 두 회사의 캐릭터가 처음으로 같은 링에 올라선 사건으로서의 무게는 이 첫 작품 쪽이 더 큽니다.
지금 다시 잡아 보면
속도는 요즘 격투 게임보다 느긋한 편입니다. 대신 한 방 한 방의 무게가 있어, 기다렸다가 상대 기술이 끝나는 틈에 확실하게 꽂아 넣는 싸움이 됩니다. 급하게 달려드는 쪽이 손해를 보는 구조라, 오히려 초보자가 붙어 볼 만한 여지가 있습니다.
둘이 붙을 상대가 없다면 레이시오 배분을 바꿔 가며 혼자 진행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레이시오 1 넷으로 끝까지 가 보는 쪽이 의외로 어렵고, 그만큼 캐릭터를 골고루 만져 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