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AKSILGAME

캡콤 월드

캡콤 월드 (Capcom World Japan) · 1989 · Capcom

방향버튼ASZX보조QERT동전Shift시작Enter

게임 화면 하단에서 —키 변경 Controls Settings·저장·불러오기 Save State / Load State

캡콤이 자기네 게임 캐릭터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한 일이 대전 격투가 아니라 퀴즈였습니다. 붉은 아리마 왕도 나오고 와일리 박사도 나오는데, 이들이 하는 일은 주먹질이 아니라 문제를 내고 답을 겨루는 것입니다. 캡콤 캐릭터 총출동이라는 발상이 격투 게임으로 정착하기 한참 전에 이미 퀴즈 게임에서 먼저 쓰였다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캡콤 월드(Capcom World)는 캡콤이 만든 아케이드 퀴즈 게임입니다. 캡콤 왕국의 공주가 납치되고, 주인공이 여섯 개의 세계를 지나며 공주를 구하러 가는 이야기 위에 문제 풀이를 얹었습니다. 각 세계의 끝에는 캡콤 게임에서 익숙한 얼굴이 기다리고 있어, 그를 상대로 문제를 겨뤄 이겨야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캡콤 월드 보드·카드 게임 화면 1 - 오락실 (1989)

주사위판 위의 퀴즈

이 게임이 다른 퀴즈물과 다른 점은 진행 방식입니다. 그냥 문제가 연달아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말판 위를 이동하며 칸에 도착할 때마다 문제가 나오는 구조입니다. 칸마다 성격이 달라서 어떤 길로 가느냐에 따라 만나는 문제의 종류와 위험이 달라집니다. 퀴즈에 보드게임의 뼈대를 얹은 셈입니다.

문제는 제한 시간 안에 답해야 하고, 상대보다 먼저 맞혀야 하는 상황도 나옵니다. 정해진 수만큼 맞히면 그 세계를 통과합니다. 그래서 아는 문제를 빨리 넘기고 모르는 문제에서 버티는 시간 배분이 실제 실력이 됩니다.

한 판의 흐름 자체는 짧습니다. 문제 하나에 걸리는 시간이 몇 초 남짓이라 판이 빠르게 흘러가고, 틀리면 곧바로 결과가 나옵니다. 그 즉각적인 리듬이 이 시기 퀴즈 게임이 오락실에서 인기를 끈 이유였습니다.

캡콤 월드 보드·카드 게임 화면 2 - 오락실 (1989)

문제가 일본어라는 벽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자 한계는 문제가 전부 일본어라는 점입니다. 게다가 내용도 일본의 상식과 시사, 그리고 캡콤 게임에 관한 지식을 다루는 것이 많습니다. 캡콤 게임 문제는 오히려 반가운 쪽이지만, 일본 방송이나 생활 상식을 묻는 문제는 사정을 모르면 손을 쓸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게임을 지금 하는 방식은 두 가지로 갈립니다. 하나는 일본어를 읽으며 정직하게 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제 자체보다 캡콤 캐릭터들이 어떻게 등장하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후자만으로도 볼거리가 적지 않습니다. 여러 게임의 얼굴들이 자기 원작과 다른 태도로 나오는 것이 이 게임의 재미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 퀴즈 게임이라는 장르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일본 오락실에는 퀴즈 게임이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액션 게임과 달리 조작 실력이 필요 없어 누구나 앉을 수 있었고, 답을 아는 사람이 옆에서 훈수를 두기 좋아 여럿이 둘러싸고 즐기기에 좋았습니다. 문제 데이터만 갈아 끼우면 새 게임처럼 보인다는 점도 제작사 입장에서는 매력이었습니다.

캡콤은 이 장르에 자기 색을 얹었습니다. 그냥 문제를 나열하는 대신 모험 구조를 씌우고, 자사 캐릭터를 등장시켜 캡콤 팬이라면 더 즐길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 방식이 통했는지 몇 해 뒤 속편이 나왔고, 가정용 기기로도 옮겨졌습니다.

한국에서는 어땠나

한국 오락실에 퀴즈 게임 기판이 아예 안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널리 놓이지는 못했습니다. 이유는 명확합니다. 문제가 전부 일본어인 데다 일본 사정을 알아야 풀리는 것이 많아, 손님이 앉아도 몇 문제 못 가서 끝나 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락실 주인 입장에서도 회전이 안 되는 기계였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퀴즈 장르는 오히려 한글로 문제를 넣은 국내 제작 기판이나, 일본어를 아는 소수가 즐기는 물건에 가까웠습니다. 캡콤이라는 이름값 덕에 화면을 본 사람은 있어도 끝까지 밀어 본 사람은 드물었던 셈입니다.

지금 다시 보면 이 작품은 퀴즈 게임 그 자체보다, 캡콤이 자사 캐릭터를 한자리에 모으는 시도를 언제부터 했는가를 보여 주는 자료로서 더 흥미롭습니다. 훗날 여러 회사의 캐릭터를 한 화면에 모으는 대전 게임들이 쏟아지기 전, 그 발상의 초기 형태가 이런 소박한 퀴즈판 위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