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팅 골프
파이팅 골프 (Fighting Golf World) · 1988 · S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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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장에 붙은 '파이팅'이라는 말
오락실에서 만나는 골프 게임은 대개 조용했습니다. 총을 쏘거나 주먹을 휘두르는 기계들 사이에서 혼자 잔디밭을 비추고 있으니 눈에 띄기는 해도 사람이 붙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게임은 제목에 '파이팅'을 달고 나왔습니다. 선택 화면에 골퍼 넷이 나란히 서서 저마다 자세를 잡는 모습은 골프보다 대전 게임 쪽에 가까워 보입니다.
파이팅 골프(Fighting Golf)는 그 넷 중 한 명을 골라 18홀 코스를 도는 스포츠 게임입니다. 티에서 공을 날리고, 페어웨이를 지나 그린에 올린 뒤 퍼팅으로 홀에 넣는 실제 골프의 순서를 그대로 따릅니다. 정해진 타수 안에 홀을 마치면 다음 홀로 넘어가고, 넘기면 그 자리에서 끝나는 방식이라 홀 하나하나가 곧 목숨입니다.
세 번 누르는 스윙
조작의 중심은 스윙 게이지입니다. 버튼을 한 번 눌러 게이지를 움직이기 시작하고, 원하는 세기에서 다시 눌러 비거리를 정하고, 되돌아오는 눈금이 가운데 표시를 지날 때 마지막으로 눌러 임팩트를 맞춥니다. 마지막 한 번이 어긋나면 공은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휘어 나갑니다.
그 앞에 결정해야 할 것이 클럽과 방향입니다. 남은 거리와 바람의 방향, 세기를 보고 클럽을 고른 뒤 조준선을 좌우로 돌려 놓습니다. 바람을 무시하고 홀만 보고 조준하면 공이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니, 맞바람일 때는 클럽을 한두 단계 길게 잡고 옆바람일 때는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미리 겨눠야 합니다.
그린에 올라오면 규칙이 또 달라집니다. 여기서는 세기보다 경사가 문제입니다. 표시된 기울기를 보고 공이 휘어 갈 만큼을 미리 계산해서 조준선을 옆으로 밀어 둡니다. 짧게 쳐서 홀 앞에 세우는 실수를 몇 번 하고 나면, 오르막에서는 넉넉하게 내리막에서는 아끼는 감이 잡힙니다.
넷 중 누구를 고를까
고를 수 있는 골퍼들은 겉모습만 다른 것이 아니라 능력이 다릅니다. 한 명은 드라이버 비거리가 확실히 길어 파5 홀을 두 번에 노려볼 수 있고, 다른 한 명은 거리는 짧아도 게이지가 다루기 편하고 좌우로 덜 흩어집니다. 어느 쪽이 좋다기보다 자기 손이 어느 쪽에 맞는지의 문제입니다.
처음이라면 거리보다 정확도를 앞세운 쪽을 권합니다. 오락실 골프에서 점수를 갉아먹는 것은 짧은 티샷이 아니라 숲과 물에 빠뜨린 한 방입니다. 멀리 보내 놓고 두 타를 벌금처럼 내주는 것보다, 안전하게 페어웨이에 놓고 세 번에 그린에 올리는 편이 결과가 좋습니다.
둘이 붙을 수도 있습니다. 번갈아 치면서 홀마다 타수를 견주는 방식이라, 상대가 티샷을 물에 빠뜨리는 순간 이쪽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그 기분이 이 게임의 진짜 대전 요소입니다.
어디서 무너지는가
초반 몇 홀은 대체로 순하게 풀립니다. 문제는 코스가 굽어 있는 홀입니다. 나무가 시야를 가로막고 있으면 지름길로 넘겨 보고 싶어지는데, 클럽 선택이 한 단계만 어긋나도 나무에 맞고 뚝 떨어집니다. 그런 홀에서는 욕심을 접고 굽은 지점까지만 안전하게 보내는 편이 결국 빠릅니다.
벙커와 러프도 만만치 않습니다. 같은 클럽으로 같은 세기를 쳐도 공이 덜 나가므로, 무조건 한 단계 길게 잡아야 겨우 계산이 맞습니다. 그린 주변 벙커에 들어가면 한 타를 손해 본다고 생각하고 안전하게 빼내는 것이 낫습니다.
정해진 타수 안에 홀아웃하지 못하면 게임이 끝나는 구조이므로, 한 홀에서 크게 무너지면 회복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게임은 화려한 장타보다 실수를 줄이는 쪽이 훨씬 오래 갑니다.
그 시절의 오락실 골프
이 게임을 만든 곳은 이카리나 사이코 솔저 같은 액션물로 이름을 알리던 회사입니다. 그런 회사가 골프를 내놓았다는 점이 당시로서는 조금 뜻밖이었는데, 캐릭터를 앞세우고 제목에 '파이팅'을 붙인 감각을 보면 액션 게임을 만들던 손이 그대로 묻어 있습니다. 북미에서는 실존 프로 골퍼의 이름을 붙여 내보내기도 했습니다.
국내 오락실에서 골프 기판은 늘 소수였습니다. 한 판이 길고 남이 하는 것을 옆에서 봐도 딱히 신나지 않으니 자리를 오래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격투와 슈팅에 지친 사람이 한 대씩 붙잡고 앉아 조용히 18홀을 도는 풍경이 있었고, 그 차분한 리듬이 이 게임의 매력입니다. 게이지를 정확히 끊어 치는 손맛만큼은 지금 잡아도 그대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