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서바이버
라스트 서바이버 (Last Survivor fd1094 317 0083) · 1989 · Se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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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명이 같은 미로 안에 들어가서 서로를 죽입니다. 열쇠를 모아야 나갈 수 있는데, 열쇠를 얻는 가장 빠른 방법은 이미 가진 사람을 죽이고 빼앗는 것입니다. 이게 1989년 오락실 게임의 규칙입니다. 훗날 데스매치라고 불리게 될 방식을, 세가는 둠이 나오기 4년 전에 오락실 기계로 구현해 놓았습니다.
라스트 서바이버(Last Survivor)는 3차원 미로를 돌아다니며 다른 참가자들과 싸우는 게임입니다. 화면은 캐릭터의 등 뒤에서 따라가는 시점이고, 주인공은 검은 선으로만 그려진 형체로 화면 가운데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목표는 미로에서 열쇠를 모아 출구를 열고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기계 네 대를 이어 붙인다
이 게임의 진짜 물건은 대전 방식입니다. 기계 한 대에 두 명이 앉습니다. 화면을 세로로 나눠 한 명은 왼쪽, 한 명은 오른쪽을 봅니다. 그리고 이런 기계를 네 대까지 이어 붙일 수 있습니다. 다 이으면 여덟 명이 같은 미로 안에 있게 됩니다.
여덟 명이 다 차지 않아도 게임은 돌아갑니다. 빈자리는 컴퓨터가 대신 채웁니다. 사람이 적은 오락실에서도 붐비는 미로를 만들 수 있도록 배려한 셈입니다.
오락실에서 기계 여러 대를 이어 붙이는 방식 자체는 이 시기에 몇몇 레이싱 게임이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나란히 달리는 것이었고, 이건 같은 공간에서 서로를 사냥하는 것입니다. 발상의 무게가 다릅니다.
미로를 도는 방법
조작에는 회전 레버를 씁니다. 레버를 밀고 당겨 앞뒤로 가고, 좌우로 밀면 몸을 옆으로 이동시킵니다. 버튼 하나는 사격이고, 다른 버튼을 누른 채 레버를 움직이면 몸이 돌아갑니다.
이 조작 체계는 이후 1인칭 슈팅 게임에서 표준이 되는 것과 거의 같은 구조입니다. 앞뒤 이동과 옆으로 이동과 회전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 이게 3차원 공간에서 싸우는 게임의 기본 문법이 됩니다. 다만 그때는 아무도 이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고, 처음 잡는 사람은 어리둥절했을 겁니다.
미로 안에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닙니다. 괴물도 돌아다니고, 이걸 잡으면 금을 떨어뜨립니다. 그러니 미로를 도는 동안 사람을 노릴지 괴물을 노릴지도 판단해야 합니다.
열쇠를 빼앗는다는 규칙
이 게임에서 가장 영리한 설계는 열쇠를 빼앗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열쇠를 직접 찾아 헤매는 것보다, 이미 찾은 사람을 죽이는 게 빠릅니다. 그러니 열심히 열쇠를 모은 사람일수록 표적이 됩니다.
이 규칙 덕분에 게임이 저절로 긴장 상태를 유지합니다. 아무도 안전하지 않고, 앞서 나간 사람이 오히려 위험합니다. 후발 주자에게는 역전의 기회가 항상 열려 있습니다.
처음 하는 사람이 알아 두면 좋은 건, 열쇠를 많이 가졌을 때 행동을 바꿔야 한다는 점입니다. 초반처럼 돌아다니면 안 됩니다. 출구 쪽으로 최단 경로를 잡고 마주침을 피하는 쪽이 낫습니다. 반대로 열쇠가 없을 때는 적극적으로 사람을 찾아다니는 게 이득입니다.
레이 캐스팅이라는 기술
이 게임의 3차원 화면은 레이 캐스팅이라는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화면의 각 세로줄마다 시선을 쏴서 벽에 닿는 거리를 재고, 그 거리에 따라 벽의 높이를 정해 그리는 방법입니다.
이 방식은 진짜 3차원 계산보다 훨씬 가볍습니다. 그래서 성능이 부족한 하드웨어에서도 돌아다닐 수 있는 3차원 공간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몇 년 뒤 울펜슈타인 3D와 둠이 PC에서 같은 원리를 써서 세상을 뒤집어 놓습니다. 라스트 서바이버는 그보다 앞서 이 기법을 오락실 기판 위에서 굴렸습니다.
게임은 세가 사내 개발팀이 만들었고, 기판에는 FD1094라는 암호화 칩이 붙어 있습니다. 이 시기 세가는 자기 게임이 복제되는 걸 막으려고 프로그램을 암호화해 두었습니다. 그 탓에 나중에 이 게임들을 되살리는 일이 오랫동안 어려웠습니다.
시대를 앞서간 게임의 운명
이 게임은 크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명백합니다. 기계 네 대를 이어 붙이려면 자리도 넓어야 하고 기계값도 네 배입니다. 여덟 명을 동시에 앉히려면 손님이 그만큼 몰려야 하는데, 그런 오락실은 많지 않습니다.
게다가 1989년 오락실 손님들에게 3차원 대전이라는 개념은 너무 낯설었습니다. 화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파악하는 것부터가 훈련이 필요한 종류였습니다. 동전을 넣고 몇 분 안에 재미를 느껴야 하는 오락실에서 이건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한국 오락실에서 이 게임을 봤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기계 여러 대를 이어 붙이는 대형 설비는 국내에 들어오기 어려웠고, 애초에 일본에서도 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게임은 추억의 대상이라기보다, 온라인 대전 게임의 조상 격으로 이야기되는 쪽입니다. 지금 켜서 미로를 몇 바퀴 돌아 보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