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바리온
사이바리온 (Syvalion World Prototype) · 1988 · Tai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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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볼로 기계 용을 몹니다
오락실 게임에서 트랙볼은 흔치 않은 조작 장치입니다. 커다란 공을 손바닥으로 굴려서 화면 속의 것을 움직이는 방식인데, 레버와 달리 굴리는 세기와 방향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이 게임은 그 트랙볼로 기계 용을 조종합니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여러 마디로 이어진 긴 몸이, 손이 굴리는 대로 미로 안을 굽이치며 나아갑니다.
이 감각이 이 게임의 전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레버였다면 여덟 방향으로 뚝뚝 끊겼을 움직임이, 트랙볼이라 매끄럽게 휘어집니다. 용의 긴 몸이 자기가 지나온 길을 따라 뒤늦게 따라오는 모습이 화면에 그려지는데, 그것만 보고 있어도 재미가 있습니다.
어떤 게임인가
사이바리온(Syvalion)은 기계 용을 조종해 미로 같은 통로를 헤치고 나아가는 액션 게임입니다. 공격 수단은 입에서 뿜는 불길 하나뿐입니다. 트랙볼로 위치를 잡고 버튼으로 불을 뿜어 앞을 막은 적과 구조물을 태우면서, 스테이지 안쪽에서 기다리는 거대한 기계 보스에게 도달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불길에는 게이지가 걸려 있습니다. 계속 뿜으면 게이지가 줄어들고, 다 쓰면 잠시 뿜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게이지는 가만히 있을 때보다 움직일 때 더 빨리 찹니다. 그러니 이 게임의 기본 운영은 "멈춰서 태우고, 다시 달리며 회복한다"가 아니라 "계속 움직이면서 필요할 때만 짧게 뿜는다"가 됩니다. 트랙볼을 계속 굴리게 만드는 아주 영리한 장치입니다.
불길이 방패이기도 합니다
이 게임에서 불길은 공격 수단이면서 동시에 방어 수단입니다. 적이 쏜 탄 대부분이 불길에 닿으면 튕겨 나가거나 지워집니다. 그래서 정면에서 탄이 날아올 때 피하는 대신 불을 뿜어 막아 내는 선택이 성립합니다.
이 규칙을 알고 나면 게임하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좁은 통로에서 탄을 피하려고 애쓰다가 벽에 몸이 걸리기 일쑤인데, 그럴 때 오히려 정면으로 불을 뿜으며 밀고 들어가는 편이 안전합니다. 다만 게이지가 비어 있으면 이 방법을 쓸 수 없으므로, 위험한 구간에 들어가기 전에는 게이지를 채워 두는 것이 기본입니다.
처음 하는 사람이 막히는 곳
가장 어려운 것은 긴 몸을 다루는 감각입니다. 머리만 보고 움직이다 보면 뒤따라오는 몸통이 어디를 지나는지 신경 쓰지 못합니다. 좁은 곳에서 급하게 방향을 꺾으면 몸통이 벽에 걸리거나, 자기 몸이 시야를 가려 앞이 안 보이는 상황이 만들어집니다. 요령은 크게 도는 것입니다. 급격히 꺾기보다 완만한 곡선으로 방향을 바꾸면 몸통이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두 번째는 속도 조절입니다. 트랙볼을 세게 굴리면 빠르게 나가지만, 그만큼 앞을 확인할 시간이 줄어듭니다. 처음 보는 통로에서는 천천히 굴려 구조를 확인하고, 길을 아는 구간에서 속도를 붙이는 것이 낫습니다. 게임 전체가 짧기 때문에, 시간을 들여 신중하게 가는 것이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100가지가 넘는 결말
이 게임이 특히 이야깃거리가 되는 대목은 결말입니다. 어떻게 플레이했느냐에 따라 나오는 엔딩이 달라지는데, 그 가짓수가 100가지를 넘습니다. 얼마나 부쉈는지, 얼마나 빨리 갔는지, 어떤 식으로 진행했는지 같은 요소들이 조합되어 결과가 정해지는 구조입니다.
1988년 오락실 게임에 이런 장치를 넣었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입니다. 오락실 게임은 대개 한 판을 끝까지 깬 사람에게 짧은 화면 하나를 보여 주고 끝내는데, 이 게임은 끝을 보는 방식 자체를 수집하게 만들었습니다. 게임 전체가 10분 남짓이면 끝날 만큼 짧다는 점도 여기에 잘 맞습니다. 짧으니 여러 번 다르게 해 볼 수 있습니다.
만든 사람과 그 시절
이 게임의 중심에는 보글보글을 만든 것으로 알려진 사람이 있습니다. 귀여운 캐릭터로 화면을 채우던 그 게임과, 기계 용이 미로를 헤치는 이 게임은 겉으로는 전혀 닮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규칙 하나를 정해 놓고 그것을 끝까지 밀어붙여 특유의 감각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는 통하는 데가 있습니다. 불길 게이지와 이동을 묶어 놓은 설계가 그렇습니다.
한국 오락실에서 이 게임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트랙볼이 달린 전용 캐비닛이 필요했고, 그런 기계는 수입 대수 자체가 적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름은 들어 봤어도 실제로 굴려 본 사람은 드문 게임에 속합니다. 지금 화면으로 다시 보면 그 시절 기준으로 상당히 부드러운 움직임과 큼직한 기계 보스들이 눈에 들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