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킥 워
사이킥 워 (Psychic War) · 1987 · Ko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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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로 싸우지 않는 RPG
RPG에서 전투라고 하면 대개 무기를 휘두르고 마법을 쓰고, 상대의 체력을 0으로 만드는 그림이 떠오릅니다. 사이킥 워는 그 그림을 쓰지 않습니다. 이 게임의 싸움은 정신력을 서로 밀어붙이는 겨루기입니다. 화면에 양쪽의 힘이 맞부딪히는 형태로 표시되고, 한쪽이 밀리기 시작하면 그대로 무너집니다.
줄다리기에 비유되곤 하는 이 방식은 1980년대 후반 일본 RPG 중에서도 확실히 별난 쪽에 속합니다. 턴을 주고받으며 명령을 고르는 익숙한 전투가 아니라, 힘의 균형을 실시간으로 유지해야 하는 싸움입니다.
어떤 게임인가
사이킥 워(Psychic War)는 코가도에서 낸 RPG로, 코스믹 솔저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초능력자들이 벌이는 싸움을 다루고, 플레이어는 주인공 일행을 이끌고 여러 층으로 된 공간을 탐색하며 적과 마주칩니다.
탐색 자체는 이 시절 RPG의 문법을 따릅니다. 미로 같은 구조를 돌아다니며 길을 찾고,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다음으로 가야 할 곳을 알아냅니다. 특이한 것은 앞서 말한 전투이고, 이 게임의 인상 대부분이 거기서 나옵니다.
전작인 코스믹 솔저가 일반적인 턴제 전투를 썼던 것과 비교하면 방향을 크게 튼 셈입니다. 시리즈를 이어 가면서 전투 방식 자체를 갈아엎는 시도는 흔치 않았습니다.
정신력 겨루기를 이해하는 법
이 전투에서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힘을 끝까지 쏟아붓는 것이 늘 정답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밀어붙이는 데에도 자원이 들고, 그 자원이 떨어지면 반대로 밀립니다. 상대가 강하게 나올 때는 버티고, 상대가 지쳤을 때 밀어붙이는 리듬을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게임에서는 상대의 상태를 읽는 것이 실력이 됩니다. 화면에 표시되는 균형이 어디로 기울고 있는지를 보면서 지금이 버틸 때인지 나갈 때인지 판단합니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잘 안 보이지만, 몇 번 겪고 나면 흐름이 잡힙니다.
싸움을 피하는 것도 선택지입니다. 이길 자신이 없는 상대와 붙어 자원을 다 쓰고 나면, 정작 꼭 이겨야 할 자리에서 아무것도 못 합니다. 지금 이 싸움이 꼭 필요한지 매번 따져 보는 편이 좋습니다.
처음 하는 사람이 막히는 지점
가장 큰 벽은 언어입니다. 일본어로만 나온 게임이고, 이야기와 안내가 글로 전달되기 때문에 읽지 못하면 다음에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지도를 직접 그려 가며 다닌 구역을 표시해 두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두 번째는 준비 부족입니다. 이런 구조의 게임은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어느 순간 감당 못 할 상대를 만납니다. 조금씩 힘을 키워 두는 과정이 필요하고, 그것을 건너뛰면 벽에 부딪힙니다.
세 번째는 저장입니다. 이 시절 게임은 어디서나 저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한참 진행한 뒤 죽으면 되돌아가는 거리가 큽니다. 안전한 지점을 확보하면서 조금씩 나아가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습니다.
코가도와 그 시절 일본 컴퓨터 게임
코가도는 일본 개인용 컴퓨터 게임 시장에서 오래 활동한 회사입니다. MSX만이 아니라 PC-88 같은 다른 기종에도 게임을 냈고, 시뮬레이션이나 어드벤처 계열에서 이름을 알렸습니다.
그 시절 일본 컴퓨터 게임은 가정용 게임기 쪽과 성격이 꽤 달랐습니다. 게임기 쪽이 짧고 명쾌한 재미를 노렸다면, 컴퓨터 쪽은 시간을 오래 들여야 하는 무거운 게임이 많았습니다. 사용자층도 나이가 있는 편이었고, 그래서 실험적인 시도가 나올 여지도 컸습니다. 이 게임의 독특한 전투 방식도 그런 토양에서 나온 것입니다.
국내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졌나
한국에서 이런 일본어 RPG는 진입 장벽이 높았습니다. MSX가 있는 집이 있어도, 글을 읽지 못하면 진행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액션 게임은 켜서 바로 할 수 있었지만 RPG는 그렇지 않았고, 그래서 이 계열은 국내에서 널리 퍼지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게임을 지금 켜 볼 이유는 있습니다. 전투 한 번만 겪어 봐도 이 게임이 무엇을 다르게 하려 했는지가 바로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글을 다 읽지 못하더라도 그 감각만은 언어와 상관없이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