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마이저 로보
슈마이저 로보 (Schmeiser Robo Japan) · 1993 · Hot-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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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격투 게임에서 당연하게 쓰는 저스트 가드, 그러니까 상대 공격이 닿는 순간에 맞춰 가드 버튼을 톡 눌러 경직을 지우고 곧바로 반격하는 기술은, 알려진 바로는 이 게임이 처음 선보였습니다. 1993년, 스트리트 파이터 II가 오락실을 통째로 지배하던 시기에, 거의 아무도 모르는 회사가 거의 아무도 모르는 로봇 격투 게임에 그 아이디어를 심어 놓은 셈입니다.
슈마이저 로보(Schmeiser Robo)는 핫비가 1993년에 일본 아케이드로만 낸 2D 대전 격투 게임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워커라 불리는 로봇을 조종해 싸우며, 여덟 명의 캐릭터가 각자 다른 기체를 타고 나옵니다. 3라운드 2선승제, 3버튼 구성으로 A는 펀치, B는 킥, C는 가드입니다.
가드를 버튼으로 하는 격투 게임
이 게임에서 가장 먼저 적응해야 할 것은 가드가 레버가 아니라 버튼이라는 점입니다. 스트리트 파이터 계열에 익숙한 손은 뒤로 당기면 막힐 거라 믿고 움직이는데, 여기서는 뒤로 당기면 그냥 뒤로 걸어갈 뿐입니다. 이 차이 하나 때문에 처음 잡은 사람은 아무것도 못 하고 두들겨 맞다가 라운드를 내주기 쉽습니다.
버튼 가드는 같은 시기 모탈 컴뱃에서도 쓰던 방식인데, 장단이 뚜렷합니다. 상대가 공격하지 않을 때도 가드 자세를 잡을 수 있고, 뒤로 물러나면서 막는 동작이 분리되니 거리 조절과 방어를 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대신 손가락이 하나 더 바쁘고, 공격 버튼과 가드 버튼을 오가는 리듬을 새로 익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저스트 가드가 얹힙니다. 계속 누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맞는 순간에 맞춰 짧게 누르면 가드 경직이 사라지고 곧바로 반격할 틈이 생깁니다. 성공하면 상대의 연속기를 끊고 흐름을 통째로 가져올 수 있어, 이 게임을 오래 붙잡는 사람들은 결국 이 타이밍 싸움에 매달리게 됩니다.
로봇으로 싸운다는 감각
캐릭터가 사람이 아니라 로봇이라는 점은 단순한 겉모습 차이가 아닙니다. 몸집이 크고 동작이 묵직해서, 사람 캐릭터 격투 게임 특유의 날렵한 잔기술보다는 한 방 한 방의 무게가 앞섭니다. 기체마다 팔다리 길이와 리치가 눈에 띄게 다르고, 그 차이가 곧 거리 싸움의 유불리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기체 선택이 곧 전략입니다. 리치가 긴 기체는 멀찍이서 견제하며 상대가 들어오길 기다리는 쪽이 편하고, 몸집이 작고 빠른 기체는 붙어서 압박하는 쪽이 맞습니다. 자기 기체의 주력 거리를 모르고 아무 데서나 버튼을 누르면, 상대 리치 안에서만 놀다가 라운드가 끝납니다.
시각적으로도 90년대 초 일본 메카 애니메이션의 감성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로봇의 실루엣, 배경의 격납고와 황량한 지형, 타격 시 튀는 파편 같은 요소들이 그 시절 로봇물을 좋아하던 사람에게는 반가운 그림입니다.
처음 하는 사람이 막히는 곳
가장 흔한 벽은 앞서 말한 가드입니다. 레버 가드가 몸에 밴 사람은 최소 몇 판을 손가락 재교육에 써야 합니다. 처음에는 아예 C 버튼에 검지나 약지를 고정해 두고, 공격은 두 버튼만 쓰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편이 빠릅니다.
두 번째 벽은 CPU의 대응입니다. 이 시기 대전 격투 게임의 CPU가 대체로 그렇듯, 같은 기술을 반복하면 어느 순간부터 정확하게 읽고 받아칩니다. 특히 뛰어들기를 반복하면 착지 지점에서 확정으로 얻어맞습니다. 지상에서 견제하다가 상대가 움직인 뒤에 들어가는, 한 박자 늦은 공격이 훨씬 안전합니다.
세 번째는 리치 착각입니다. 로봇 스프라이트가 크다 보니 눈으로는 닿을 것 같은데 실제 판정은 짧은 기술이 있습니다. 몇 판 돌려 보면서 각 기술이 실제로 어디까지 닿는지 눈에 익혀 두면, 헛손질로 큰 반격을 허용하는 일이 크게 줄어듭니다.
핫비라는 회사와 그 뒤
핫비는 낚시 게임 시리즈와 몇몇 콘솔 작품으로 이름이 알려진 일본 회사입니다. 아케이드 대전 격투는 이 회사의 주무대가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슈마이저 로보는 회사가 남긴 마지막 무렵의 아케이드 작품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핫비는 이 게임을 낸 이듬해에 경영난으로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이 게임은 후속작도, 이식판도 없이 그 자리에 멈춰 섰습니다. 일본 내수용으로만 나왔고, 스트리트 파이터 II와 아랑전설, 그리고 곧 등장할 킹 오브 파이터즈 사이에서 자리를 잡을 여지가 거의 없었습니다. 한국 오락실에도 들어온 사례가 많지 않아, 이 게임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지금 다시 보면
역사적으로 이 게임이 흥미로운 것은 저스트 가드라는 개념 때문입니다. 훗날 가드 임팩트와 저스트 디펜스, 블로킹 같은 이름으로 여러 회사가 다듬어 낸 시스템의 원형이 이 무명작에 이미 들어 있었다는 사실은, 격투 게임의 계보를 따라가다 보면 한 번쯤 마주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게임 자체가 당대 명작들과 어깨를 겨룰 만큼 완성도가 높지는 않습니다. 동작이 다소 뻣뻣하고 밸런스도 거친 편입니다. 다만 로봇끼리 무겁게 맞부딪히는 감각과, 가드 버튼을 정확히 눌러 상대 공세를 끊어 내는 순간의 쾌감은 이 게임만의 것입니다. 한 번쯤 잡아 볼 가치는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