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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플린터 셀

톰 클랜시의 스플린터 셀 (Tom Clancy S Splinter Cell E Patience) · 2003 · Ubiso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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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는 것이 이기는 것

대부분의 액션 게임은 적을 만나면 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 게임은 정반대를 요구합니다. 적을 보면 숨으라고 합니다. 총은 있지만 쏘는 순간 대개 일이 나빠지고, 가장 좋은 결과는 아무도 내가 지나갔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 발상은 2000년대 초에 잠입 액션이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스플린터 셀이 내세운 것은 빛과 그림자였습니다. 밝은 곳에 서 있으면 들키고, 어두운 곳에 붙어 있으면 바로 앞을 지나가는 경비도 나를 못 봅니다. 화면 한쪽에 내가 지금 얼마나 밝은 곳에 있는지를 보여 주는 표시가 있고, 플레이어는 사실상 그 표시를 보며 게임을 합니다.

스플린터 셀 액션 게임 화면 1 - 게임보이 어드밴스 (2003)

어떤 게임인가

스플린터 셀(Splinter Cell)은 첩보원 한 명이 적진에 홀로 들어가 임무를 수행하는 잠입 액션입니다. 정면 돌파는 거의 불가능하게 짜여 있고, 대신 경비의 순찰 경로를 관찰하고 그 틈을 비집고 지나가는 것이 게임의 전부입니다.

이 게임보이 어드밴스판은 거치 기기의 3차원 화면을 그대로 옮기는 대신, 옆에서 본 2차원 화면으로 다시 만들었습니다. 주인공은 화면 안에서 좌우로 움직이고, 사다리를 타고 위아래 층을 오가며, 벽에 붙거나 몸을 낮춰 시야에서 벗어납니다. 보는 각도는 달라졌지만 요구하는 판단은 같습니다. 언제 움직이고 언제 멈출 것인가.

한 판의 흐름

한 구역에 들어서면 먼저 할 일은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경비가 몇 명인지, 어디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오는지, 그 주기가 얼마나 되는지를 눈으로 재야 합니다. 이 관찰을 건너뛰고 무작정 들어가면 거의 반드시 걸립니다.

경로가 눈에 들어오면 그다음은 구간을 쪼개는 일입니다. 여기서 저 기둥까지, 저 기둥에서 다음 어두운 자리까지. 한 번에 목적지까지 가려 하지 말고 안전한 지점을 징검다리처럼 이어 가는 것이 기본입니다. 한 구간을 건너고 나면 다시 멈춰서 다음 구간을 재는 식으로 반복합니다.

들켰을 때의 대처도 배워야 합니다. 이 장르에서 발각은 대개 즉사가 아니라 상황 악화입니다. 경보가 울리고 지원 병력이 오고, 원래 통했을 경로가 막힙니다. 그래서 들키자마자 싸우려 들기보다 일단 시야에서 빠져나가 경계가 풀리기를 기다리는 편이 나은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 하는 사람이 답답해하는 지점

이 장르를 처음 접하면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화면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동안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 액션 게임에 익숙한 손은 자꾸 앞으로 나가려 합니다. 그 조급함이 실패의 가장 흔한 원인입니다.

두 번째는 저장 지점입니다. 잠입 게임은 한 번의 실수로 구간을 통째로 다시 하게 되는 일이 잦습니다. 같은 구간을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반대로 보면 반복할수록 경비의 움직임이 완전히 외워져서 나중에는 물 흐르듯 통과하게 됩니다. 이 순간의 쾌감이 잠입 게임의 보상입니다.

세 번째는 작은 화면입니다. 휴대용 기기의 좁은 시야는 잠입 게임과 상성이 좋지 않습니다. 화면 밖에 있는 경비를 미리 알 수 없으니, 거치 기기판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합니다.

휴대용으로 옮긴다는 일

2000년대 초반에는 거치 기기의 인기작을 휴대용으로 옮기는 일이 매우 흔했습니다. 그런데 성능 차이가 워낙 커서, 그대로 축소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식판은 대개 장르의 겉모습만 남기고 속을 다시 짜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 게임도 마찬가지입니다. 3차원 공간에서 벽 뒤로 돌아가며 시야를 속이던 재미는 2차원 화면에서 구현할 수 없으니, 대신 층과 통로를 이용한 위치 싸움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원작을 기대하고 잡으면 아쉽지만, 별개의 잠입 퍼즐로 보면 제 몫을 합니다.

그 시절 휴대용 게임의 자리

게임보이 어드밴스는 휴대용 기기가 처음으로 제법 그럴듯한 그림을 보여 주기 시작한 물건이었습니다. 그 전 세대의 흑백 화면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컬러에 배경이 여러 겹으로 흐르는 화면 자체가 꽤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 덕에 이 시기에는 온갖 유명 작품이 휴대용으로 옮겨졌습니다. 잘 옮긴 것도 있고 이름만 빌린 것도 있었는데, 지금 다시 보면 그 시도 자체가 시대의 기록입니다. 작은 화면 안에 큰 게임을 어떻게든 욱여넣으려던 그때의 고민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