젬파이어
젬파이어 (Gemfire USA) · 1992 · Ko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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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를 만들던 회사가 판타지를 만들면
코에이라고 하면 삼국지와 노부나가의 야망이 먼저 떠오릅니다. 실존 인물과 실제 역사 위에 내정과 전투를 얹는 것이 이 회사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마법사와 드래곤이 나오는 판타지 전략 게임을 내놨다는 것 자체가 당시에는 흥미로운 일이었습니다.
결과물은 뜻밖에 잘 어울립니다. 역사물의 뼈대인 영토 관리와 장수 배치는 그대로 두고, 그 위에 마법과 몬스터를 올려놓은 구조라 코에이 게임을 해 본 사람은 설명서 없이도 금방 감을 잡습니다. 반대로 판타지 쪽으로 들어온 사람에게는 생각보다 계산할 것이 많은 게임입니다.
여섯 가문과 여섯 개의 보석
젬파이어(Gemfire)는 이스메르라는 섬나라를 무대로 여섯 가문이 패권을 다투는 전략 시뮬레이션입니다. 폭군이 마법의 보석 여섯 개를 나누어 각 가문에 봉인해 두었고, 이 보석을 모두 모으는 것이 승리 조건입니다.
플레이어는 여섯 가문 중 하나를 골라 시작합니다. 어느 가문을 고르느냐에 따라 처음 가진 영토와 병력, 거느린 장수의 면면이 크게 달라져서, 같은 지도를 두고도 전혀 다른 판이 됩니다. 강한 가문으로 시작해 정석대로 밀어붙일 수도 있고, 약한 가문을 골라 어려운 조건에서 버텨 볼 수도 있습니다.
내정과 전투가 번갈아 오는 한 턴
한 턴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자기 영토를 돌보는 시간과, 이웃 영토로 군대를 보내는 시간입니다. 내정에서는 세금을 걷고, 농사를 관리하고, 병사를 모으고, 무기를 사들입니다. 전투를 벌이려면 병사와 식량이 있어야 하니 내정을 소홀히 하면 싸울 기반 자체가 없어집니다.
장수를 다루는 방식도 코에이답습니다. 장수마다 능력치가 다르고 충성도가 있어서, 홀대하면 다른 가문으로 떠나거나 배신합니다. 상금을 주고 관직을 맡겨 마음을 붙잡아 두는 관리가 필요합니다. 사로잡은 적장을 설득해 자기편으로 만드는 것도 세력을 키우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격자판 위의 전투
전투는 격자로 나뉜 지도 위에서 부대를 한 칸씩 움직이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지형에 따라 이동과 전투력이 달라지고, 부대의 병종에 따라 상성이 있습니다. 정면으로 부딪치기보다 옆이나 뒤를 잡는 편이 유리해서, 여러 부대를 나눠 우회시키는 운용이 통합니다.
여기에 판타지 요소가 들어옵니다. 마법을 쓰는 장수는 전장에서 광범위한 공격이나 아군 강화를 걸 수 있고, 몬스터 부대를 거느린 장수는 일반 병사가 감당하기 힘든 힘을 냅니다. 보석이 가진 힘도 전투에 영향을 주어, 보석을 모을수록 판이 유리하게 기울어집니다.
전투에는 정해진 턴 수가 있어서, 시간 안에 결판을 못 내면 공격 측이 물러납니다. 병력을 많이 모아 놓고도 우물쭈물하다 아무 성과 없이 돌아오는 일이 흔하니,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몇 턴 안에 어디까지 밀어붙일지 계산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외교와 시나리오
힘만으로 풀리지 않는 상황도 있습니다. 다른 가문과 동맹을 맺어 강한 세력을 함께 견제하거나, 혼인으로 관계를 다지는 선택지가 있습니다. 여섯 가문이 서로를 견제하는 구도라 두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받는 상황을 피하는 것이 초반의 관건입니다.
시작 상황을 달리한 여러 시나리오가 들어 있어서, 한 번 끝냈다고 게임이 끝나지 않습니다. 가문을 바꿔 다시 시작하면 지도의 힘 관계가 뒤바뀌기 때문에, 앞선 판에서 통했던 전략이 그대로 먹히지 않습니다. 이 반복 가치가 이 게임이 오래 회자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