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RPG
천지를 먹다 (Destiny of an Emperor USA) · 1990 · Ca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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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를 소재로 한 게임은 셀 수 없이 많지만, 병사 숫자가 곧 체력인 전투 시스템을 처음 제대로 보여준 작품은 흔치 않습니다. 이 게임에서 장수 한 명은 홀로 싸우는 영웅이 아니라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이고, 적의 공격을 받으면 줄어드는 것은 장수의 기력이 아니라 휘하 병사의 수입니다. 병사가 바닥나면 그 장수는 쓰러집니다. 롤플레잉 게임의 체력 수치에 군대라는 옷을 입힌 이 단순한 발상 하나로, 전투 화면의 인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천지를 먹다(Destiny of an Emperor)는 같은 제목의 만화를 원작으로 삼은 패미컴 롤플레잉 게임입니다. 플레이어는 유비를 중심으로 한 무리를 이끌고 중원 각지를 돌면서 적장을 무찌르고, 항복한 장수를 부하로 받아들이며 세력을 키워갑니다. 마을에서 정보를 모으고 야외에서 적을 만나 싸우는 전형적인 구조를 따르지만, 파티를 구성하는 방식과 전투의 계산이 여느 롤플레잉 게임과 다릅니다.
병사와 장수, 그리고 계략
전투에 나설 수 있는 장수는 한 번에 다섯 명입니다. 각 장수는 무력과 지력에 해당하는 수치를 가지고 있고, 무력이 높으면 평타 피해가 크며 지력이 높으면 계략의 성공률과 위력이 올라갑니다. 화계와 같은 계략은 적 전체의 병력을 한꺼번에 깎아내리기 때문에, 무력만 높은 장수들로만 팀을 짜면 대군을 상대할 때 시간이 훨씬 오래 걸립니다.
적장을 쓰러뜨리면 그를 등용할 기회가 생깁니다. 이름난 장수를 부하로 들이는 순간이 이 게임의 큰 즐거움이고, 누구를 남기고 누구를 내보낼지 고민하게 만듭니다. 다만 자리는 한정되어 있으니, 무력 담당과 계략 담당의 균형을 생각해서 자리를 배분해야 후반이 편해집니다.
병사 수는 곧 체력이므로, 전투가 끝나고 병사를 보충하는 일이 회복에 해당합니다. 돈과 시간을 들여 병력을 채워야 하니 자원 관리가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무리하게 진군하다가 병사가 얼마 남지 않은 채로 강한 적을 만나면 순식간에 전멸합니다.
어디서 막히는가
초반의 난관은 돈과 병력이 동시에 부족한 시기입니다. 새 지역으로 넘어가면 적 부대의 병력 규모가 눈에 띄게 커지는데, 준비 없이 들어가면 첫 전투에서 반쯤 갈려버립니다. 다음 지역으로 넘어가기 전에 근처에서 충분히 싸워 병력과 자금을 모아두는 것이 정석입니다.
계략을 쓰는 적장을 만났을 때도 흐름이 크게 흔들립니다. 이쪽 전체 병력을 한 번에 깎는 계략이 연달아 들어오면 회복이 따라가지 못합니다. 이럴 때는 지력이 높은 장수를 앞세워 상대의 계략을 무력화하거나, 계략을 쓰는 장수부터 집중해서 먼저 쓰러뜨리는 편이 낫습니다.
여러 사람이 공통으로 겪는 또 하나의 벽은 길찾기입니다. 다음에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표시가 친절하지 않아서, 마을 사람들의 말을 흘려들으면 넓은 지도 위를 헤매게 됩니다. 대화를 꼼꼼히 읽는 것이 결국 가장 빠른 공략입니다.
다른 삼국지 게임과의 차이
같은 소재를 다룬 전략 시뮬레이션 계열은 내정과 외교, 부대 이동에 시간을 들이는 반면, 이 게임은 그런 관리 요소를 걷어내고 롤플레잉의 구조 안에 삼국지를 밀어 넣었습니다. 성을 개발하거나 세금을 매기는 화면은 없습니다. 대신 이야기를 따라가며 장수를 모으고 전투를 치르는 흐름이 계속됩니다. 삼국지를 좋아하지만 시뮬레이션의 복잡한 수치 관리에는 흥미가 없던 사람에게 잘 맞는 형태였습니다.
또 하나의 차이는 속도입니다. 명령을 내리면 다섯 장수의 행동이 빠르게 흘러가고, 잔챙이 부대는 몇 초 만에 정리됩니다. 반복 전투가 지루해지지 않게 하려는 배려가 곳곳에 보입니다.
만든 곳과 국내에서의 기억
이 게임을 만든 회사는 오락실 액션과 슈팅으로 이름을 알린 곳이지만, 같은 원작을 두고 오락실용 벨트스크롤 액션과 가정용 롤플레잉이라는 전혀 다른 두 갈래를 동시에 내놓았습니다. 오락실에서 관우와 장비를 조종해 적병을 쓸어 담던 사람들이 집에서는 같은 인물들을 지휘관으로 부리게 된 셈입니다. 같은 세계관을 장르에 맞춰 다시 설계한 사례로 종종 언급됩니다.
국내에서는 이 작품을 정식 명칭보다 삼국지가 나오는 롤플레잉이라는 식으로 부르며 퍼졌습니다. 영어 문장이 적지 않아 진행이 쉽지 않았지만, 익숙한 인물 이름이 계속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끝까지 붙잡고 있던 사람이 많았습니다. 등용 화면에서 좋아하던 장수의 이름이 뜰 때의 기분은, 그 시절 이 게임을 해본 사람이라면 대체로 비슷하게 기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