섀도우런 (슈퍼패미컴)
섀도우런 (Shadowrun Europe) · 1993 · Data 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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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실에서 깨어나는 시작
게임을 켜면 주인공이 시체 보관용 서랍 안에서 눈을 뜹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왜 총에 맞았는지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문을 열고 나오면 시체를 정리하러 온 직원들이 놀라서 총을 겨눕니다. 이 첫 장면 하나로 이 게임이 어떤 분위기인지가 단숨에 전해집니다.
이후로도 이 게임은 친절하게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목적지도 지도에 찍히지 않고,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려 주지 않습니다. 대신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단어를 물어보며 스스로 실마리를 이어 붙여야 합니다. 이 불친절함이 오히려 진짜 뒷골목을 헤매는 느낌을 만들어 냅니다.
어떤 게임인가
섀도우런(Shadowrun)은 마법이 되살아난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테이블 게임을 원작으로 삼은 액션 RPG입니다. 기억을 잃은 주인공이 자신을 노린 자들의 정체를 쫓아 도시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사고, 사람을 고용하고, 총격전을 벌입니다.
시점은 위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형태이고, 조준선을 직접 움직여 적을 겨눕니다. 턴제가 아니라 실시간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엄폐물 뒤에 숨었다가 나와서 쏘는 식의 움직임이 필요합니다. RPG인데도 몸으로 하는 감각이 강한 편입니다.
단어를 모으는 대화
이 게임에서 가장 독특한 건 대화 방식입니다. 사람을 만나면 지금까지 들은 단어 목록이 뜨고, 그중 하나를 골라 물어봅니다. 새로운 단어를 들으면 목록에 추가되고, 그 단어를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 또 다른 실마리가 나옵니다.
그래서 이 게임의 진행은 단어를 캐내는 과정 자체입니다. 별 뜻 없어 보이는 이름 하나를 엉뚱한 사람에게 물어봤다가 결정적인 정보가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대신 물어볼 사람과 단어를 놓치면 진행이 막히니, 새 단어를 얻으면 만났던 사람들에게 다시 물어보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몸과 실력을 사는 성장
적을 쓰러뜨리면 카르마라는 점수가 쌓이고, 이걸로 능력을 올립니다. 총 실력, 체력, 마법 관련 능력 등을 원하는 쪽으로 배분할 수 있어서 같은 게임을 해도 사람마다 성장 방향이 갈립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도 많습니다. 더 좋은 총과 방탄복은 물론이고, 몸에 기계 부품을 심어 능력을 올릴 수도 있습니다. 다만 몸을 기계로 채울수록 마법 쪽 소질이 줄어드는 구조라, 총잡이로 갈지 마법 쪽으로 갈지 방향을 정해야 합니다. 돈을 주고 동료를 고용해 함께 다닐 수도 있는데, 총격전이 벅찰 때 큰 도움이 됩니다.
전선 너머의 세계
중반부터는 컴퓨터망에 직접 접속하는 구간이 열립니다. 접속하면 화면이 완전히 바뀌어 격자무늬 공간 안에서 방어 프로그램과 싸우게 됩니다. 여기서 얻은 정보가 현실 쪽 진행을 여는 열쇠가 되기도 합니다.
마법 쪽도 마찬가지로 별도의 축을 이룹니다. 영혼의 세계로 넘어가 안내자를 만나고, 그 대가로 새로운 주문을 배웁니다. 총과 마법과 전산망이라는 세 축이 한 게임 안에 얽혀 있어서, 겉보기보다 훨씬 촘촘한 게임입니다. 슈퍼패미컴 시절에 이런 어두운 세계관과 자유로운 진행을 담아낸 작품이 많지 않았던 터라, 지금도 숨은 명작으로 자주 꼽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