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랜드
판타지 랜드 (Fantasy Land SET 1) · 19?? · Electronic Devices Ita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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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한 마리를 데리고 다니는 이탈리아산 액션
주인공 옆에 앵무새가 붙어 다닙니다. 이 새는 장식이 아니라 실제로 함께 총알을 쏘아 주는 동료입니다. 주인공이 사격하는 방향으로 새도 같이 쏘기 때문에, 새가 붙어 있는 동안에는 화면을 정리하는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집니다. 90년대 초 유럽 아케이드 게임 특유의 어딘가 어긋난 색감과 통통 튀는 캐릭터 디자인 위에 이런 장치가 얹혀 있어, 처음 보면 무슨 게임인지 헷갈리다가 몇 초 만에 감이 옵니다.
판타지 랜드(Fantasy Land)는 이탈리아 회사 일렉트로닉 디바이시스가 만든 횡스크롤 플랫폼 액션 게임입니다. 여자친구를 납치당한 금발의 주인공이 그를 되찾기 위해 여러 세계를 가로지르는 구성으로, 발판을 뛰어 넘으며 나아가는 플랫포머의 뼈대에 사격이 얹힌 형태입니다. 적은 총으로 쏘아 없앨 수도 있고 머리 위로 밟아서 처리할 수도 있어서, 상황에 따라 두 가지 처리 방식을 골라 쓰게 됩니다.
한 판의 흐름과 스테이지 테마
기본 흐름은 단순합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나아가면서 발판을 타고 오르내리고, 앞을 막는 적을 정리하고, 구간 끝에 도달하면 다음 무대로 넘어갑니다. 조작은 이동과 점프, 사격의 세 요소로 끝나기 때문에 처음 잡은 사람도 십여 초면 익힙니다.
무대마다 테마가 확실히 갈립니다. 중세풍 성곽 구간, 중동풍 사막 구간, 눈이 쌓인 설원 구간, 물속을 헤엄치는 수중 구간, 그리고 어두운 던전 구간이 있어서 배경과 적 구성이 통째로 바뀝니다. 수중 구간은 특히 감각이 달라지는데, 점프 대신 위아래로 헤엄치는 이동으로 바뀌면서 발판 개념 자체가 사라집니다. 지상 구간의 요령이 통하지 않아 여기서 목숨을 여럿 잃는 사람이 많습니다.
무대 곳곳에 아이템이 배치되어 있어 점수를 올리거나 화력을 보강할 수 있습니다. 위로 올라가는 길이 여러 갈래로 나뉘는 구간에서는 굳이 안전한 아래쪽만 고집하지 말고 위쪽 발판을 타는 편이 아이템 수확에 유리합니다.
처음 하는 사람이 막히는 지점
가장 흔한 사망 원인은 밟기 판정입니다. 적의 머리를 밟아 처리하는 동작이 있지만 판정 범위가 넉넉한 편이 아니어서, 조금 어긋나면 밟은 게 아니라 옆구리에 부딪힌 것으로 처리되어 그대로 한 대 맞습니다.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밟으려 하지 말고 거리를 두고 쏘는 편이 안전합니다. 밟기는 좁은 발판 위에서 총을 겨눌 각도가 나오지 않을 때의 마지막 수단으로 남겨 두는 것이 좋습니다.
두 번째는 앵무새 관리입니다. 새가 붙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화력 차이가 상당해서, 새를 잃고 나면 같은 구간이 갑자기 어려워집니다. 새가 있는 동안 최대한 앞으로 밀고 나가고, 새를 잃었다면 무리해서 전진하기보다 화면 가장자리에서 적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하나씩 정리하는 쪽이 낫습니다.
세 번째는 낙하입니다. 이 시절 유럽제 플랫포머가 대개 그렇듯 점프의 관성이 조금 미끄럽습니다. 발판 끝에서 곧바로 뛰기보다 반 걸음 여유를 두고 뛰는 습관을 들이면 헛디디는 일이 크게 줄어듭니다.
유럽 아케이드 기판이라는 배경
일렉트로닉 디바이시스는 이탈리아에 기반을 둔 아케이드 제작사입니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의 아케이드 시장은 일본 대형 제작사들이 사실상 표준을 정하고 있었고, 유럽 업체들은 그 틈에서 소규모로 기판을 만들어 자국과 인근 시장에 돌리는 형태로 존재했습니다. 이런 게임들은 대개 개발 인원이 적고 예산이 빠듯했기 때문에, 완성도의 편차가 크고 개별 요소의 다듬기가 덜 된 경우가 많습니다.
이 게임 역시 그런 특징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캐릭터 그림과 배경 연출은 밝고 개성이 있는데, 판정과 조작감의 세밀한 조율은 같은 시기 일본 대형 제작사의 플랫포머에 미치지 못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그 어긋남 자체가 유럽제 아케이드 특유의 질감이기도 합니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일본산 게임만 하다가 이런 작품을 만나면, 익숙하지 않은 물성 때문에 오히려 기억에 남습니다.
여럿이 함께 즐기는 것을 염두에 둔 설계라는 점도 눈에 띕니다. 혼자 하면 화력이 아쉬운 구간도 둘이 붙으면 훨씬 수월하게 넘어갑니다.
지금 다시 해 볼 만한가
이 게임은 국내 오락실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작품은 아닙니다. 한국 오락실의 기판 유통은 일본 신작과 그 복제 기판, 그리고 국내 업체의 물량이 중심이었고 유럽제 게임은 들어올 통로 자체가 좁았습니다. 그래서 이 게임을 알아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지금 해 볼 이유가 됩니다. 같은 시기 일본산 플랫포머와 비교하면 리듬과 손맛이 확실히 다르고, 앵무새 동료라는 발상이나 수중 구간의 전환 같은 요소는 짧게라도 신선합니다. 한 판이 길지 않으니 부담 없이 눌러 보고, 자기 취향이면 스테이지 테마가 바뀌는 재미로 끝까지 밀어붙여 볼 만한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