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스핀
그래스핀 (Grasspin) · 1983 · Zilec Electronics
게임 화면 하단에서 —키 변경 Controls Settings·저장·불러오기 Save State / Load State
미로 게임에서 벽은 보통 어쩔 수 없는 조건입니다. 정해진 길이 있고 플레이어는 그 안에서 도망 다닙니다. 그런데 이 게임은 벽을 플레이어가 돌릴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통로 구조를 그 자리에서 바꿔 쫓아오던 적의 앞을 막아 버리거나, 반대로 자기 도망길을 새로 여는 식입니다. 지형이 고정되어 있다는 미로 게임의 대전제를 건드린 셈이라, 화면만 보면 평범해 보여도 실제로 잡아 보면 머리 쓰는 결이 다릅니다.
그래스핀(Grasspin)은 1983년에 나온 아케이드 미로 게임입니다. 영국의 질렉 일렉트로닉스가 만들고 자레코가 배급하는 형태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플레이어는 미로 안을 돌아다니며 화면 곳곳에 놓인 깃발을 정해진 순서대로 모아야 하고, 그동안 적들은 계속 플레이어를 쫓아옵니다.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할 수 있습니다.
한 판의 흐름
한 판이 시작되면 미로와 그 안에 흩어진 깃발들이 보입니다. 깃발에는 순서가 정해져 있어서, 가까이 있다고 아무거나 집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 집어야 할 깃발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고, 거기까지 가는 경로를 적을 피하며 짜야 합니다. 이 순서 제약 때문에 화면 전체를 크게 도는 동선이 강제되고, 그만큼 적과 마주칠 일이 늘어납니다.
핵심 장치는 회전하는 벽입니다. 특정 지점에서 조작하면 미로의 한 구획이 통째로 돌아가면서 통로가 다시 연결됩니다. 잘 쓰면 뒤쫓아 오던 적을 벽 반대편에 가둬 놓고 유유히 빠져나갈 수 있고, 잘못 쓰면 자기가 막다른 곳에 갇힙니다. 이 게임을 처음 하는 사람이 가장 자주 죽는 이유가 바로 두 번째 경우입니다.
깃발을 모두 모으면 다음 판으로 넘어가고, 미로 구조와 적의 수가 조금씩 달라집니다. 오락실 게임답게 판이 넘어갈수록 여유가 줄어드는 방식으로 난이도가 올라갑니다.
처음 하는 사람이 익혀야 할 것
먼저 벽을 돌리는 걸 도망 수단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이 장치는 공간을 나누는 도구입니다. 적이 여럿 붙어 있을 때 한꺼번에 떼어내려 하기보다, 벽을 한 번 돌려 적 무리를 둘로 갈라 놓고 적은 쪽으로 빠져나가는 편이 훨씬 안전합니다.
두 번째로 익힐 것은 다음 깃발까지의 경로를 미리 그려 두는 습관입니다. 순서가 정해져 있으니 지금 깃발을 집는 순간 다음 목적지는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깃발에 손을 대기 전에 다음 경로를 봐 두면, 집자마자 방향을 잃고 우물쭈물하다 둘러싸이는 일이 사라집니다.
세 번째는 막다른 통로를 기억해 두는 것입니다. 미로 게임에서 죽는 이유는 대부분 적의 속도가 아니라 갈 곳이 없어져서입니다. 각 판마다 절대 들어가면 안 되는 구석을 한두 곳 정해 두고, 그쪽으로는 아예 발을 들이지 않는 쪽이 안전합니다.
1983년 오락실의 미로 게임들
1980년대 초반은 미로 게임이 한 장르로 자리 잡던 시기입니다. 화면 하나에 모든 것이 들어가고, 규칙이 한눈에 보이고, 실력이 늘어나는 게 즉시 느껴지는 구조가 오락실에 잘 맞았습니다. 다만 그만큼 비슷한 게임이 쏟아졌기 때문에, 살아남으려면 남들과 다른 장치가 하나쯤 필요했습니다.
그래스핀이 고른 장치가 회전하는 벽입니다. 미로 구조를 플레이어가 바꾼다는 발상은 이 시기 몇몇 게임에서 비슷하게 시도됐고, 그중에서 이 게임은 회전 구획을 여러 개 두어 판마다 다른 해법이 나오도록 짰습니다. 적을 직접 공격하는 수단 없이 지형만으로 상황을 뒤집게 만든 점에서, 순수한 위치 싸움에 가까운 게임입니다.
만든 곳과 남은 흔적
질렉 일렉트로닉스는 영국에 있던 개발사로, 이 시기에 몇 편의 아케이드 게임을 만들어 일본 회사를 통해 유통했습니다. 유럽 개발사가 만든 기판이 일본 배급망을 타고 나가는 구성 자체가 그리 흔하지 않던 때라, 이 게임은 지금도 초창기 아케이드 역사를 짚을 때 이름이 오르내립니다.
다만 널리 팔린 게임은 아니어서, 국내 오락실에서 이 기판을 직접 봤다는 기억은 드뭅니다. 1983년이면 국내에는 팩맨 계열과 갤러그 계열이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게임은 그 시절을 겪은 사람에게도 대체로 처음 보는 화면일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 해 볼 만한 이유
그래픽과 소리는 시대 그대로입니다. 대신 규칙이 짧아서 설명 없이 앉아도 몇 분 안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파악됩니다. 벽을 돌려 적의 진로를 끊는 감각은 요즘 게임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종류라, 초창기 미로 게임이 어떤 식으로 변주를 시도했는지 확인해 보기에 좋은 표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