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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카오스

닥터 카오스 (Dr Chaos USA) · 1988 · F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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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을 그으면 다른 세계가 열립니다

이 게임의 첫인상은 조용합니다. 낡은 저택 복도에 혼자 서 있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걸어 다니며 문을 열고 벽을 조사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어느 벽을 칼로 긋는 순간 화면이 일그러지면서 전혀 다른 공간이 열립니다. 조용하던 탐색이 갑자기 괴물이 달려드는 액션으로 바뀌는 그 전환이, 이 게임을 기억하게 만드는 장면입니다.

무섭다기보다 불길합니다. 배경음악은 단조롭고, 방은 대체로 비어 있으며, 어느 문 뒤에 무엇이 있을지 알려 주는 표시가 없습니다. 패미컴 게임 중에 이런 분위기를 노린 작품이 드물었기 때문에, 당시 처음 접한 사람들에게는 유난히 오래 남았습니다.

닥터 카오스 플랫폼 게임 화면 1 - 패미컴 (1988)

어떤 게임인가

닥터 카오스(Dr. Chaos)는 실종된 형을 찾아 저택에 들어간 주인공이 방을 하나씩 뒤지며 단서와 무기를 모으는 탐색 액션 게임입니다. 저택 안에서는 옆에서 본 화면으로 걸어 다니며 문을 열고, 가구와 벽을 조사합니다. 그러다 특정한 벽을 그으면 이공간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열리고, 그 안에서는 몬스터가 나오는 액션 구간이 펼쳐집니다.

두 화면이 번갈아 나오는 구조라 성격이 뚜렷합니다. 저택은 느리고 신중한 시간이고, 이공간은 반응 속도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이공간에서 얻은 아이템으로 저택의 막힌 곳을 열고, 다시 새 통로를 찾아 들어가는 식으로 조금씩 범위를 넓혀 갑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탐색형 액션의 초기 형태에 해당합니다.

저택 안에서 걸어 다닐 때는 적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긴장이 풀리기 쉬운데, 이 게임은 그 조용한 시간에 무엇을 조사했는지가 이후 진행을 전부 결정합니다. 서두르지 말고 방 하나를 끝까지 훑고 나오는 편이 결과적으로 빠릅니다.

닥터 카오스 플랫폼 게임 화면 2 - 패미컴 (1988)

무기와 성장

시작할 때 가진 것은 칼 한 자루뿐입니다. 진행하면서 권총, 수류탄, 산탄총 같은 무기를 얻고, 방어구와 체력을 늘려 주는 물건도 손에 넣습니다. 무기마다 탄이 따로 있어서, 강한 것을 언제 꺼낼지 판단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잡졸에게 좋은 것을 다 쓰면 정작 큰 놈 앞에서 칼을 휘두르게 됩니다.

체력 관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회복 수단이 넉넉하지 않고, 이공간에서 한 번 크게 맞으면 만회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무리해서 안쪽까지 밀고 들어가기보다, 아이템을 챙긴 시점에 일단 빠져나오는 판단이 자주 필요합니다.

무기를 얻는 순서에 따라 체감 난이도가 크게 달라집니다. 사거리가 긴 것을 일찍 손에 넣으면 이공간 구간이 훨씬 편해지고, 반대로 칼만 들고 안쪽까지 들어가면 금세 체력이 바닥납니다. 새 무기를 얻었다면 이전에 포기했던 곳으로 돌아가 볼 만합니다.

막히는 지점과 요령

가장 자주 막히는 이유는 어디를 조사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겉보기에 아무 표시도 없는 벽 뒤에 통로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아서, 결국 방마다 벽을 차근차근 그어 보게 됩니다.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 게임에서는 그 과정 자체가 진행입니다. 방을 하나 정리했으면 어디까지 조사했는지 기억해 두는 편이 좋고, 종이에 저택 구조를 그려 두면 훨씬 수월합니다.

이공간에서는 무작정 전진하지 않는 것이 요령입니다. 화면 끝에서 적이 나타나는 위치가 정해져 있는 구간이 많아서, 조금씩 나아가며 적이 어디서 오는지 확인한 뒤 대응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좁은 통로에서 여러 마리가 겹치면 빠져나올 방법이 거의 없으므로, 그런 곳에서는 물러났다 다시 들어가는 것을 반복하게 됩니다.

저장 수단이 넉넉하지 않던 시절의 게임이라, 한 번 앉으면 꽤 오래 붙잡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디까지 갔는지를 종이에 적어 두고 다음에 이어서 하던 기억이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 시절의 자리

패미컴에는 액션과 슈팅이 넘쳤지만, 이렇게 분위기로 밀고 가는 게임은 흔치 않았습니다. 조작이 뻣뻣하고 안내가 부족해 친절한 게임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저택을 뒤지다 벽 뒤에서 다른 세계가 나오는 구조는 당시로서는 신선했고, 이후 탐색형 액션이 널리 퍼지기 전에 비슷한 감각을 먼저 보여 준 축에 듭니다.

국내에서는 문방구와 대여점의 카트리지, 그리고 여러 게임이 묶인 합팩을 통해 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름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도, 벽을 긋다가 갑자기 화면이 바뀌던 장면 하나로 기억하는 게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