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밍스
레밍스 (Lemmings Europe) · 1993 · Sunso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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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절벽으로 걸어가는 것들
이 게임의 주인공들은 플레이어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문이 열리면 초록 머리의 작은 생물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서, 앞만 보고 계속 걷습니다. 벽에 부딪히면 돌아서고, 낭떠러지가 나오면 그대로 떨어집니다. 그러다 죽습니다. 아무도 멈추라고 말해 주지 않으면 전부 죽습니다.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들에게 직접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몇몇에게 직업을 부여해 무리 전체의 진로를 바꾸는 것입니다. 한 마리를 그 자리에 세워 벽처럼 만들면 뒤따라오던 무리가 전부 돌아섭니다. 한 마리에게 삽을 쥐여 주면 바닥을 파서 아래층으로 가는 길이 생깁니다. 개체가 아니라 흐름을 다루는 게임입니다.
어떤 게임인가
레밍스(Lemmings)는 정해진 수의 레밍을 출구까지 데려가는 퍼즐 게임입니다. 각 스테이지마다 몇 마리 이상을 살려야 통과인지가 정해져 있고, 쓸 수 있는 직업의 종류와 개수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직업은 여덟 가지입니다. 낙하산을 펴서 안전하게 착지하게 하는 것, 절벽을 기어오르게 하는 것, 그 자리에 서서 다른 레밍을 되돌리는 것, 계단을 쌓아 올리는 것, 앞을 파고 나아가는 것, 아래로 파는 것, 비스듬히 파는 것, 그리고 자폭해서 벽을 부수는 것입니다. 이 여덟 개를 언제 누구에게 쓰느냐가 문제의 전부입니다.
남는 자와 버리는 자
이 게임이 특별한 이유는 도덕적으로 껄끄러운 계산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스테이지에서는 한 마리를 그 자리에 세워 벽으로 삼아야 나머지가 살아 나갑니다. 그 한 마리는 스테이지가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게 되고 결국 구조되지 못합니다.
자폭 직업은 더 노골적입니다. 막힌 벽을 뚫으려면 누군가 그 앞에서 터져야 합니다. 통과 조건이 백 마리 중 아흔 마리라면, 열 마리는 처음부터 희생시켜도 되는 수로 계산에 넣게 됩니다. 귀엽게 생긴 것들을 놓고 이런 셈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이 게임 특유의 뒷맛을 만듭니다.
시간과의 싸움
스테이지에는 제한 시간이 있고, 레밍들은 그동안에도 계속 걷습니다. 그래서 여유롭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무리의 선두가 절벽에 도달하기 전에 누군가를 세워야 하고, 계단을 쌓기 시작할 자리도 미리 정해 둬야 합니다.
방출 속도를 조절하는 기능이 있어서, 문에서 레밍이 나오는 간격을 늘리거나 줄일 수 있습니다. 초반에 천천히 내보내 앞쪽 길을 정리한 뒤 속도를 올려 한꺼번에 통과시키는 운영이 자주 쓰입니다. 화면을 잠시 멈추고 상황을 살펴보는 것도 가능해서, 급할 때는 일단 멈추고 계획을 세우는 습관이 도움이 됩니다.
여러 기기로 퍼진 게임
레밍스는 원래 컴퓨터용으로 나왔고 큰 성공을 거두면서 거의 모든 게임기로 옮겨졌습니다. 이 패미컴판은 원작의 방대한 스테이지를 이 기기의 사양에 맞춰 다듬은 것입니다. 화면이 좁아 지형 전체를 한 번에 볼 수 없어 좌우로 화면을 움직여 가며 파악해야 하고, 마우스 대신 커서를 방향키로 옮기는 방식이라 원작보다 손이 더 갑니다.
그래도 문제 자체의 재미는 조금도 줄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답이 없어 보이던 지형에서 계단 하나를 어디에 놓느냐로 길이 열리는 순간의 쾌감은 여전합니다. 한 스테이지가 짧아 잠깐씩 붙잡고 풀기에도 좋은, 퍼즐 게임의 고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