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밍즈 PC엔진
레밍즈 (Lemmings) · 1992 · Sunso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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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 없이 절벽으로 걸어가는 것들
레밍즈를 처음 켜면 문이 열리고 초록 머리의 작은 것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것들은 앞만 보고 걷습니다. 앞에 벽이 있으면 돌아서고, 앞에 낭떠러지가 있으면 그대로 떨어집니다. 물이 있으면 빠지고, 함정이 있으면 잡아먹힙니다. 스스로를 지킬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래서 플레이어는 신경이 곤두섭니다. 화면 왼쪽에서 나온 무리가 오른쪽 낭떠러지를 향해 태연히 걸어가는 동안, 나는 그 앞에 뭔가를 해 줘야 합니다. 이 무력한 것들을 살려야 한다는 압박이 이 게임 전체를 끌고 가는 감정입니다. 몇 마리가 떨어져 사라질 때 나는 그 소리가 유난히 마음에 걸립니다.
어떤 게임인가
레밍즈(Lemmings)는 계속 걷기만 하는 레밍 무리에게 역할을 부여해서, 정해진 수 이상을 출구까지 데려가는 퍼즐 게임입니다. 한 스테이지마다 몇 마리가 나오는지, 몇 마리를 구해야 통과인지, 그리고 어떤 역할을 몇 번 쓸 수 있는지가 정해져 있습니다. 제한 시간도 있습니다.
역할은 여덟 가지입니다. 벽을 세워 길을 막는 역할, 땅을 아래로 파는 역할, 옆으로 파는 역할, 비스듬히 파는 역할, 계단을 쌓는 역할, 우산을 펴고 안전하게 내려오는 역할, 절벽을 오르는 역할, 그리고 스스로 폭발해 벽을 뚫는 역할입니다. 이 여덟 개를 언제 누구에게 주느냐가 문제의 전부입니다.
퍼즐이 풀리는 방식
한 스테이지를 처음 보면 대개 막막합니다. 그런데 몇 번 실패하고 지형을 살펴보면 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게임의 핵심은 한 마리를 희생시켜 나머지를 살리는 판단입니다. 선두 하나를 붙잡아 벽으로 세우고 나머지를 되돌리거나, 한 마리를 폭발시켜 통로를 뚫는 식입니다.
시간과 자원이 빠듯하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계단을 쌓을 수 있는 횟수가 두 번뿐인데 세 곳에 계단이 필요해 보인다면, 그중 한 곳은 다른 방법으로 풀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어진 도구의 개수 자체가 힌트인 셈입니다.
무리가 계속 쏟아져 나오는 와중에 조작해야 하므로, 급하면 일시적으로 흐름을 잡을 방법도 씁니다. 문에서 나오는 속도를 조절하거나, 벽 세우는 역할로 앞을 막아 두고 뒤쪽을 정리하는 식입니다.
처음 하는 사람이 막히는 지점
가장 흔한 실수는 아무에게나 역할을 주는 것입니다. 마우스로 찍을 때 원하던 개체가 아니라 옆에 있던 개체가 선택되는 일이 자주 생기고, 그 한 번의 실수로 스테이지가 통째로 망가집니다. 무리가 겹치지 않은 순간에 찍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두 번째는 되돌릴 수 없다는 점을 잊는 것입니다. 땅을 판 것은 다시 메울 수 없고, 폭발한 개체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한 수를 두기 전에 이게 정말 여기가 맞는지 한 번 더 생각하는 편이 결국 빠릅니다.
세 번째는 구조해야 하는 최소 수를 놓치는 것입니다. 화면 아래에 몇 마리를 구했는지 표시되는데, 이걸 보지 않고 진행하다가 마지막에 한 마리가 모자라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유가 몇 마리인지 미리 계산해 두면 희생을 어디까지 감수할지 정할 수 있습니다.
여러 기계로 퍼진 게임
레밍즈는 원래 컴퓨터용으로 나와 큰 성공을 거뒀고, 그 뒤 거의 모든 가정용 기계로 옮겨졌습니다. 조작이 마우스를 전제로 만들어진 게임이라, 패드를 쓰는 기계로 옮길 때마다 커서를 어떻게 움직이게 할지가 숙제였습니다.
PC엔진판도 그 숙제를 안고 나온 판본입니다. 화면과 스테이지 구성은 원작을 따르고, 조작은 이 기계에 맞게 손봤습니다. 국내에서 레밍즈는 오락실보다 컴퓨터 쪽에서 알려진 게임이었지만, 퍼즐 자체가 워낙 잘 만들어져 있어서 어느 기계로 처음 만났든 인상이 비슷합니다. 한 스테이지를 몇십 분 붙들고 있다가 답을 찾았을 때의 그 기분은 지금 해도 똑같습니다.